2,600조 사모펀드의 균열

불루아울 캐피탈의 개인 투자자의 환매 영구 중단을 보며

by 전하진

블루아울 캐피탈, 펀드 1개 환매 영구중단 공지…

엘-에리언 "금융위기 직전 연상"

블루아울 주가 장중 10%↓…아폴로·아레스 등 사모펀드 주가 하락세

정보기술(IT) 업종 사모대출에 투자를 늘려온 미국의 사모펀드 블루아울 캐피털이 19일(현지시간) 운영 펀드 중 하나의 환매를 영구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사모대출 시장을 향한 위험성 경고가 월가 안팎에서 지속돼온 가운데 이날 뉴욕증시에서 주요 사모펀드 주가가 급락세를 나타냈다


최근 뉴스의 헤드라인입니다.


각국 은행이 돈을 찍어 경제를 돌리는 관행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과연 이 구조는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 것일까에 대한 의구심이 많이 드는 상황입니다. 뉴스에서는 사모신용이니 환매 중단이니 하는 어려운 말들이 쏟아지지만, 그 핵심은 의외로 간단하고 비정합니다. 오늘은 우리 지갑과 연결된 이 은밀한 메커니즘을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수익률을 향한 위험한 쓰리쿠션

원래 기업이 돈을 빌릴 때는 은행에 갑니다. 하지만 은행은 심사가 까다롭고 규제도 많습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사모펀드입니다. 소수의 큰손들에게 돈을 모아 은행보다 빠르고 유연하게 기업에 직접 돈을 빌려주는 것이죠. 이를 사모신용이라 부르며, 전 세계적으로 무려 2,600조 원 규모까지 커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모펀드의 실제 주인은 이름 모를 부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낸 보험료, 우리가 맡긴 연금, 우리가 이용하는 은행 자금이 그 주인공입니다. 제도권 금융사들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자, 사모펀드라는 중간 매개체를 통해 위험한 대출 시장에 뛰어든 것입니다. 마치 당구에서 쓰리쿠션 치 듯 자신들이 하기 힘든 일을 사모 펀드에게 맡겨 맞추기 힘든 수익률을 맞추려고 한 것이지요. 겉으론 안정적인 투자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간판만 바꾼 위험한 투자였던 셈입니다.


AI 거품과 닫혀버린 문

그렇다면 사모펀드는 대체 어떻게 높은 수익률을 내걸 수 있었을까요? 핵심은 위험자산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최근 이 자금들은 AI 데이터 센터IT 인프라에 집중적으로 몰렸습니다. AI가 세상을 바꿀 거라는 장밋빛 전망에 기대어 엄청난 돈을 빌려준 것이죠. 하지만 기대만큼 수익이 나지 않자, 운용사는 충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투자자에 대한 환매 영구 중단, 한마디로 투자금을 돌려줄 수 없다 입니다. 어찌 되든 돈이 막히게 되면 투자자들에게 연쇄적인 피해가 가게 됩니다.


이것은 투자가 아니라 책임의 회피입니다. 제도권 금융은 수익이라는 달콤한 열매만 취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이 든 성배' 같은 위험은 사모펀드라는 칸막이 뒤로 숨겨버렸습니다. 결국 사고가 터지면 그 칸막이 뒤에 줄 서 있던 평범한 개인들의 노후 자금이 가장 먼저 희생 제물이 됩니다


알리안츠그룹의 고문인 모하메드 엘-에리언은 블루아울의 펀드 환매 중단 소식에 대해 "이는 지난 2007년 8월과 유사한 '탄광 속의 카나리아' 순간일까"라고 언급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8월 프랑스 최대 은행 BNP파리바는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자산에 투자한 펀드 3개의 환매를 전격 중단,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부실 우려가 확산하는 전조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시적 문제인가, 아니면 구조적 문제인가?

블루아울의 환매 중단 선언을 보며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투자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시적인 문제일까요? 아니면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일까요?


역사는 반복됩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2020년 팬데믹 이후의 유동성 공급까지, 위기를 덮기 위해 돈을 찍어내는 방식은 늘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나 더 큰 균열과 불평등을 남겼습니다. 지금의 사모신용 시장 위기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사모신용 시장은 몇 배로 커지며 2,600조 원 규모에 이르렀고, 블루아울의 환매 중단은 단순한 예외가 아니라 이 거대한 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유동성이라는 핑계, 로직이라는 실체 운용사는 자산 가치는 멀쩡하지만 잠시 현금이 부족할 뿐이라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본질은 다릅니다. 애초에 현금화하기 어려운 IT 인프라와 AI 거품에 제도권의 단기 자금을 밀어 넣은 것 자체가 머니로직의 오만이었습니다. 남의 돈으로 쓰리쿠션을 치더라도 수익을 내지 않으면 안되는 구조 자체가 한편으로는 성장을 견인하는 동력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구조적 모순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찍어낸 돈으로 연명하는 시대의 종말 각국 은행이 돈을 찍어내 실물 경제의 구멍을 메우는 관행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사모펀드라는 그림자 금융의 균열은 그동안 찍어낸 가짜 돈들이 갈 곳을 잃고 썩어가고 있다는 신호탄입니다. 숫자로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즉 지배와 성장의 로직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음을 엘 에리언의 카나리아가 경고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균열, 이제는 ‘머니로직’의 비상구를 열어야 할 때

블루아울의 환매 중단 사태는 단순히 어느 한 펀드의 불운이 아닙니다. 전문가들은 이를 유동성 위기, 즉 잠깐 돈이 돌지 않는 문제로 치부하려 하지만, 본질은 탐욕적인 수익률을 위해 설계된 구조적 결함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물론 수십 년간 찍어낸 돈으로 유지되어 온 이 거대한 금융 시스템을 단기간에 개혁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머니로직은 여전히 강력한 관성으로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 속도와 덩치는 이미 통제 불능의 상태에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 분명한 경고를 던집니다. 시스템이 멈춰 서고 내 돈이 인질이 되는 순간, 숫자로 된 가치는 한순간에 허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당장 완벽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더라도, 머니로직에서 새로운 로직으로의 구조적 변환을 시도해야 합니다.


국가 차원에서도 단순히 돈을 찍어내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금융이 다시 삶터의 하부구조를 단단히 바꾸는 데 투자해야 합니다. 에너지, 식량, 돌봄 같은 생존 인프라에 집중하는 분산형 투자 모델이야말로 지속가능한 국가를 만드는 길입니다. 양적 팽창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질적 성장, 즉 삶의 토대를 단단히 하는 성장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거대 금융의 파도에 내 생존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 아니라, 가장 기초적인 내 삶터의 기본적인 구조를 전환해야 합니다. 최소한의 에너지와 먹거리, 그리고 돌봄과 같은 실질적인 삶의 토대를 자립한 다시 말해 생존 주권을 확보한 국민들이 많아져야 국가가 지속가능해 질 수 있습니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 작은 실험들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독일의 재생에너지 협동조합은 지역 주민들이 직접 투자해 마을의 에너지 자립을 이뤄냈고, 일본의 로컬푸드 네트워크는 농민과 소비자가 직거래를 통해 안정적인 먹거리 생태계를 구축했습니다. 북유럽의 돌봄 공동체는 국가 시스템이 흔들려도 지역 단위에서 돌봄을 이어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이와 같은 단편적인 지속가능한 대안들을 하나로 모아 구조화한 분산형 생존 인프라인 살림셀을 구축하는 것이 그 첫걸음입니다. 외부 시스템의 마비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생태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 인류가 지금까지 이룩한 양적 성장을 질적 성장으로 전환하는 기본 인프라가 되어야 합니다.


살림셀은 단순히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마을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머니로직의 거대한 파도가 덮쳐올 때 우리 가족의 식탁과 온기를 지켜낼 '방파제'이자, 외부의 금융 시스템이 마비되어도 자율적으로 돌아가는 '독립된 생존 엔진'입니다. 돈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는 시대에 살림셀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생존 전략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어떻게 더 많은 숫자를 가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관계와 토대 위에서 내 삶을 지속할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머니로직의 비상구 너머에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살림, 풍요, 윤리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가짜 숫자의 감옥에서 걸어 나와 실질적인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야 할 때입니다


>>>> 3월 초에 출간 예정인 "돈이 당신을 지켜주지 못할 때" 라는 책의 원고입니다. 참고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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