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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하진 Nov 09. 2021

어떤 일자리가 늘어야 하는가?

일의 진정한 정의는 무엇일까?

얼마 전 정부는 소비 진작을 한다며 11조원에 달하는 재난지원금을 뿌렸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를 돕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작년에 한국개발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엄청난 자금투여에도 소비 기여는 30%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시중에 돈을 풀고 소비를 진작시켜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지금의 정책은 앞으로도 지속되겠지만 과연 그 효과가 기대만큼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이다. 아마도 소비를 줄여 환경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탄소도 줄여야 하고 환경파괴의 주범이라는 소고기 소비도 줄여야겠다고 다짐하는 자들이 늘어나는 추세이고, 기후위기 대응을 주제로 하는 예능프로까지 등장한 상태이니 이런 추세는 더욱 거세게 확산되리라 예상된다.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는 ‘뭐 소수의 환경운동가들이 저런다고 대세가 바뀌겠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지속가능발전’이라는 키워드는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기업도 인간중심의 환경과 사회를 생각하는 ESG경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기업가들을 만나보면 ESG경영이 화두다. 하지만 아직 해답을 제대로 찾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지속가능발전이란 지구촌의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살아가는 생태계로 거듭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화두가 된 것은 지난 산업혁명 시대 이후 인류가 저지른 자연에 대한 횡포에 기인한다. 탐욕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후세들이 사용해야 할 자원을 마구 파해 쳐 우리의 탐욕을 채우는데 써버렸다. 결국은 지구촌이 거대한 하나의 어항과 같은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고 대 멸종을 기다리는 꼴이 된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이기심과 경쟁심으로 무장하여 더 높이, 더 많이, 더 크게 가지려는 탐욕으로 이루어진 지금의 사회시스템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그것은 폭식으로 얻은 병 때문에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이 된다. 따라서 양적 성장을 위해 존재하는 수많은 일자리는 사라져야 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보다 훨씬 효율적인 기계들까지 나서 일자리를 말려버릴 것이다. 그 종류나 숫자는 상상을 초월한다. 자율주행차가 도로를 달리는 순간 운전자라는 직업의 소멸은 순식간에 벌어 질이다. 이번 코로나19로 수많은 키오스크가 주문을 받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불과 2년 남짓한 시간에 벌어진 현상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곳의 AI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져 시스템 곳곳에서 그들의 활약이 감지된다. 아무리 똑똑하고 힘이 좋아도 이제 그것이 경쟁력이 되지 못한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불과 몇 년 만 지나도 세상이 확 바뀔 텐데, 교육은 여전히 100년 전 형식의 책상과 칠판을 앞에 두고 5년 정도 준비해야 출판이 가능한 교과서에 의존해 낡은 정보를 주입시키고 있다. 그것도 아무리 열심히 해 봐야 기계와의 경쟁에서 백전백패할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교육부장관이나 교육자들 입에서 지금 우리가 하는 교육은 이제 곧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는 공포스러운 경고를 들어 본 적이 없다. 학생이 줄어들고 수많은 대학이 폐교 위기에 몰리고 있는 지금도 아이들은 그런 대학을 가겠다고 대부분이 엎드린 채 의미 없는 수업을 흘려듣고 있다. 이제 선생님들도 일으켜 세우는 것조차 힘겨운 모습이다. 아마 그들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이 수업의 내용이 얼마나 무의미 한지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지.


그렇다면 인간은 사라져야 할 대상인 것일까. 희망이 있다면 인간은 적어도 우리가 창조한 기계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라진 일자리를 되찾으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일자리를 창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에 대한 정의부터 제대로 할 필요가 있다.


일은 사람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행하는 모든 생계 활동을 의미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일자리를 찾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의 정의를 좀 더 깊게 들어가 보면 자신의 삶을 만들고, 인간의 본성을 획득하는 가운데 역사성과 사회성을 갖추며 결국에는 자신을 완성하는 수단이 바로 일이다. 다시 말해 생계를 유지하는 것 이상의 가치는 바로 자신을 완성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일을 통해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박평원은 그의 저서 ‘일철학’에서 일은 자신만의 의지와 생각을 가지고 자연이나 사람, 사회 등과의 관계 속에 이를 구체화하여, 상대를 이롭게 하는 정제된 행위라고 정의했다. 개인의 욕구가 사회적 합리로 결합되고 승화될 수 있는 구체적이고 보편타당한 행위가 ‘일’이며, 일을 통해 ‘자아실현’이 구현되고, ‘사회성’을 획득하며, ‘역사성’을 추구할 때 비로소 ‘일’다워 진다고 했다.



이쯤에서 우리가 일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도구적인 삶’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주체적인 삶’ 즉 일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신의 일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일은 자아실현을 구현하는 방법이다. 어떤 것이 되던 자신의 의지와 생각이 전제되지 않은 도구적 삶은 직업일 뿐,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사라지는 일자리라는 것은 바로 도구적 삶을 위한 일자리들이고 진정한 일을 찾는 노력은 앞으로 더욱 더 활성화될 것이고 그래서 우리들은 인간의 최상위 욕구인 자아실현의 욕구를 구현하는 단계로 접어들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이제 인간에게는 주체적 삶을 살기 위한 일을 수행하며 자신의 본성을 찾고 사회성과 역상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일이다. 어떤 행위 던 간에 오로지 자신이 정의하고 결정하고 반복하면서 정제된 일을 만들어야 한다. 아마도 이런 행위는 70%는 무형의 세계에서 일어날 것이고 현실세계는 지속가능발전을 위해 관리대상이요. 복구대상으로서 행위들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환경을 마구 파헤쳐 더 만들고 더 팔려고 애쓰고 그래서 많은 쓰레기를 쏟아내는 지금의 경제시스템은 이제 그 한계에 다다랐다.




이제는 지구촌의 모든 생명체에게 이로운 일을 행하면서 모두가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혜를 만들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야 할 때이며 그 핵심가치는 바로 우리의 DNA에 박혀 있은 ‘홍익인간’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인이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과 개념 그리고 지혜 또한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제품 등에 전념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무한한 일자리가 탄생하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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