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평이면 충분해
제가 사는 동네는 90년대 지어진 아파트 단지들이 많습니다. 30년이 된 아파트라 구조도 오래된 스타일이고 게다가 30평대 평형이 대부분입니다. 자녀를 가진 3~4인 패밀리를 염두에 두고 안방과 거실을 크게 설계한 방 3개짜리 집을 만든 거죠. 당시에는 출산율이 지금과 많이 달랐으니, 아파트 평면도 역시 30년 전 인구구조와 가족을 고려한 크기와 레이아웃을 적용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이제는 세 집 건너 한 집이 혼자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20대뿐만 아니라 50대 이상 중장년 층에서도 1인 가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주거 선호도 조사 내용들을 보면 많은 분들이 30평대 아파트를 가장 이상적인 주거 형태라고 답을 합니다. 넓은 집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넓으면 좋죠. 문제는 늘어나는 면적만큼 주거비의 부담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꼼짝없이 바닥에 깔고 있어야 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각자에게 꼭 필요한 만큼의 주거 면적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사회초년생이 처음 독립을 하게 되면 작은 원룸이나 오피스텔을 알아보게 됩니다. 작게는 3평에서 여유가 있다면 6~7평 정도의 원룸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첫 독립의 설렘이 조금씩 사라지고 몇 번의 사계절이 지나면 나도 모르게 가구, 생활용품, 옷가지 등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어쩌다 필요한 물건들이 하나씩 늘어나게 되면 갑자기 집이 너무 좁다고 느껴지죠. 그럼 자연스럽게 조금씩 넓은 집을 찾아보게 됩니다. 큰 집에 대한 욕망이 경험적으로 싹트기 시작하는 거죠.
수납공간이 정말 중요하구나! 침실은 꼭 분리되어 있으면 좋겠다! 나만의 드레스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재택근무까지 염두에 둔다면 뭐 서재를 꿈꾸기까지 합니다. 뭐라 하겠습니까, 아주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이죠. 복권 당첨의 상상까지 곁들여지면 눈앞에 30~40평대 멋진 주방과 알파룸까지 포함된 브랜드 아파트가 머릿속에 그려지게 됩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그렇게 이상적인 주택이 수도권 30평대 아파트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 아래는 모두 현실 타협인거죠. 언젠가는 저정도 꿈을 꼭 이룰 거야라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목표가 형성되면, 작은 평수의 주거지는 인내하며 거쳐가야 하는 중간 과정일 뿐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문제의식을 느낍니다. 원룸과 20~30평대 아파트 중간에 합리적인 주거 솔루션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아파트 선호 현상이 워낙 강하다 보니, 다가구 다세대 빌라는 임시 거처로 생각하는 경향이 큽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집주인 잘못 만나면 전세 사기를 당할 수도 있고, 집의 컨디션도 겉만 보고 들어가기가 두렵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임대시장은 개인 단위 임대사업자가 대다수이므로, 규모도 작고, 관리도 체계적이지 않아 임차인이 신경 써야 할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쓰레기 버리는 것조차 이렇게 버리는 게 맞나 싶고, 안전도 개인이 알아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니 전 국민이 아파트 청약에 인생을 걸 수밖에 없습니다.
집을 장만해야 하는 2030 세대뿐만 아니라, 이미 집을 보유하고 있는 5060 세대도 머리가 아픕니다. 은퇴 시기는 다가오는데, 100세 시대를 대비한 노후 자금은 예상하기도 어렵고, 보통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운 좋게 집 장만 타이밍을 잡은 사람들은 그래도 부동산 자산을 활용하면 되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큰 결단이 필요하죠. 은퇴 후에도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계속 머물 것인지, 외곽으로 거주지를 이전할 것인지, 평수를 줄일 것인지, 고향으로 내려갈 것인지, 실버타운에 입주할 것인지, 주택연금에 가입할 것인지 등 이 모든 경우의 수 하나하나가 꽤 복잡한 계산이 필요합니다. 주거를 변경함으로써 얻게 되는 경제적 실익과 본인이 감내해야 하는 거주 경험을 비교하고 대비해야 하죠. 노후 생활에서 본인이 무엇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이 어떤 성향인지에 따라 선택지가 크게 바뀔 수 있습니다.
대게 중장년이 되면, 일상에 패턴이 생기고 본인의 취향이 뚜렷해집니다. 물건에 대한 선호도도 분명하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명확해지죠. 더불어 개인의 성향을 표현하는 소유물들도 늘어납니다. 게다가 젊을 때와 비교해서 지출 여력이 커지다 보면 가구나 가전제품처럼 덩치가 큰 물건들이 집안을 채우게 됩니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도 버리지 못하고 비싼 공간만 차지하게 됩니다. 5060 세대가 집을 줄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을 표현하는 각종 물건들을 보관할 공간이 점점 더 필요합니다. 이 물건들을 처분하는 행위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사실 어떻게 버려야 할지도 막막합니다.
현행 주택법이 규정하는 1인 최소 주거면적은 14제곱미터 입니다. 대략 4.2평 정도 크기죠. 작은 호텔 룸 크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나마 정부에서 2004년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 주거면적을 규정하고, 2011년에 14제곱미터로 개정하면서 현재까지 주택공급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최소 기준이므로, 장기간 거주하기에는 수납공간과 프라이버시에 문제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집이 좁기로 유명한 일본 조차 1인 최소 주거면적이 25제곱미터(약 7.6평)로 규정되어 있으니, 이 규정도 개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1인 최소 주거면적 규정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부분 주택 공급자들은 공간을 최대한 나누어 팔수록 수익이 커지는 구조입니다. 같은 면적에 더 많은 세대를 만들면 그만큼 분양 및 임대 수익이 커지는 사업 모델입니다. 그래서 법적 최소 면적기준이 일반적으로 공급되는 대부분의 주거 크기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쾌적하고 오래 살만한 1인 가구에 적절한 주택공급이 적을 수밖에 없고, 대부분의 소형 주택들은 최소한의 규정만 맞춘 채 사용자에게 공급되고 있습니다.
고객이 그곳에서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불편을 겪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던 것이죠. 그동안 늘 주택시장은 공급이 부족했고, 만들면 팔리는 시장이고, 소형 주택은 잠시 거쳐가는 중간 상품이었기 때문에 주거 품질 개선에 대한 요구사항이나 고객경험은 임차인이나 임대인, 그리고 공급자에게도 큰 화두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1인 가구가 합리적이고 쾌적하고 가성비 좋은 패션시장의 '유니클로'같은 주택이 부재한 이유입니다.
유니클로 같은 주거 브랜드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1인 가구는 주택시장의 대세가 되었고, 이미 오를 대로 오른 수도권 주택가격은 사람들에게 '합리적 면적'을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혼자 장기간 거주하기에 쾌적하고 합리적인 주거 면적은 어느정도일까요?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국민주택 평형을 전용면적 85제곱미터 이하, 즉 30평대 아파트를 국민주택 평형 기준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적어도 우리나라 전체 가구수의 3분의 1이 혼자 사는 가구이고, 2인 가구까지 포함하면 60%를 차지하고 있으니, 국민주택 평형의 기준이 새롭게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국민주택 규모인 전용면적 85제곱미터(전용 25평)의 30평대 아파트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런 집에 거주할 경우 만약 자녀가 성인이 되어 독립을 하게 되면, 자녀 방이 공실이 되는데요, 부모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집에 들를 자녀를 위해 방을 남겨두거나 짐을 보관하는 곳으로 놔두곤 합니다. 실질적으로 집에 남게 된 부모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공간을 전체 면적의 일부분입니다. 30평 평면도를 펼치고, 실제 일상 동선을 펜으로 연속해서 그으면, 부부 또는 1인을 위한 필수 공간은 그렇게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수납공간을 감안하더라도 말이죠.
우리나라 실버타운에서 가장 대표적인 평형대는 15평 전후입니다. 1~2인 시니어를 대상으로 만든 주택이기도 하고, 개인 전용면적을 줄이고, 공용 부대시설과 서비스를 강조하는 것이 실버타운의 특징입니다. 그동안 30~40평대 넓은 집에 사셨던 분들도 실제 꼭 필요한 공간으로 설계된 실버타운에서 불편함 없이 건강하고 쾌적한 일상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히려 기존 집에서 누리지 못했던 운동공간이나 식당, 라운지 등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으니, 집이 좁아졌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가사 서비스를 이용하더라도, 15평 집 내부에 주방과 침실, 욕실, 수납공간, 거실, 세탁실 그리고 테라스까지 갖춰진 집도 있습니다. 최근 도심에 등장한 최고급 오피스텔도 15평 전후의 소형 평형대가 1인 가구를 타겟하여 어필하고 있습니다. 1인에게는 대략 12평부터, 부부나 2인 가구에는 20평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합리적 평형대의 주거 상품들이 조금씩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넓은 집이 좋죠!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남은 40년을 고려하면, 주거 다운사이징은 불가피한 선택입니다. 그럼에도 집을 줄여가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마치 자신이 은퇴 후 초라해지는 모습을 외부에 드러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자존감이 내려가는 느낌이죠. 강남 한복판의 초고급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15평이든 20평이든 면적이 줄어드는 것이 아무렇지 않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면적이 줄어드는 만큼 마음이 위축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심정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크기의 주택 공급이 시장에 다양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면적은 줄이되 공동주택의 편리함과 신뢰할 수 있는 주거 환경을 유지하고 싶지만, 여전히 시장에는 이런 품질과 편리성을 보장하는 주택 상품을 매우 찾기 어렵습니다. 다가구, 다세대 빌라나 주거용 오피스텔 정도가 선택지입니다. 빌리지형 전원주택이나 타운하우스는 다운사이징과는 다른 방향이고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Downsizing with Dignity
집은 가장 값비싼 소비재 상품입니다. 모두에게 예외 없이 필요한 상품이죠. 모든 사람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면서도 가장 오랫동안 고객이 외면된 시장입니다. 3개월이면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상품도 아닙니다. 한번 만들면 변경이나 폐기도 어렵습니다. 자동차를 개발할 때도 5년을 앞서 트렌드를 읽고 새로운 기술을 접목해서 새로운 라인업을 기획하고 신제품을 출시합니다. 한번 만들면 30~50년 이상을 사용하는 주택은 어떤가요? 인구구조 변화, 라이프스타일 변화, 기술 변화를 가장 앞서 접목해야 하는 분야입니다. 면적이나 동네 입지, 구분도 잘 안 되는 아파트 브랜드가 주거 상품의 가치를 좌우하는 시대가 빨리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다양한 상품이 등장하고, 면적과 자존감이 정비례하지 않는 진짜 라이프스타일 주거 상품이 주거 시장에 새로운 솔루션으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나라 국민은 자산중 65%가 부동산이라고 합니다. 미국 29%와 비교하면, 부동산에 묶여있는 자산이 매우 높아보입니다.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그만큼 노후에 유동화하기 쉽지 않은 형태로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죠. 늘어가는 수명에 대비해야 합니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주택시장 가격도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 있습니다. 주거 다운사이징은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이슈가 될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주거 품질과 합리적 주거 서비스와 커뮤니티가 접목된 새로운 주거 대안이 머지않아 자리를 잡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