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의 집 장만은 은퇴 세대의 빅 이슈
올해로 결혼 이십 주년이 되었습니다.
살아온 날들이 참으로 감사하지만, 살아갈 날들도 많은 지혜가 필요한 시절입니다. 앞으로 두 배는 더 살아야 할 장수 사회 때문이기도 하고, 그동안 당연했던 게 더 이상 당연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현명한 부부라면 무엇을 새로 시작하고(start), 무엇을 그만두고(stop), 무엇을 잘 유지할지(continue) 잘 살펴야 합니다.
뭘 시작하고, 뭘 관두고, 뭘 유지할까
실감하시겠지만, 요즘은 출산율뿐만 아니라, 혼인율도 역대 최저라고 합니다. '22년 기준으로 한 해 혼인건수가 19만 건이고('16년엔 28만 건), 초혼 연령도 남자 34세, 여자 31세로 늦어지고 있습니다. 주변에 보더라도 30대 중후반을 넘겨 결혼하는 경우가 정말 많아졌습니다. 최재천 교수 말씀처럼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한국에서 애 낳아봐야 먹을 것도 없고 숨을 곳도 없으니,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더불어 혼인율이 낮아지는 것도 덩달아 이해가 됩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유전자가 더욱 예민한 탓일까요, 우리 환경이 훨씬 열악해서일까요? 한 번도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우리가 앞장서 체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고 두렵습니다.
정보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원래 자연스럽게 남녀의 끌림과 호기심으로 시작된 연애부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SNS 덕분에 호기심은 잠깐이면 팩트체크 가능하고, 외모뿐만 아니라 건너 건너면 평판도 가늠이 됩니다. 결혼은 성공사례보다 실패 사례가 콘텐츠화 되어 쉽게 퍼지고, 주변 결혼 선배들은 꿀 떨어지는 이야기보다, 결혼 역경을 안주삼아 쓴 술잔을 기울입니다.
덕분에 2030 세대에게 결혼은, 감당해야 할 책임, 희생해야 할 권리, 제한될 자유가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키워드가 되었습니다. 계산기를 돌려 서로 인풋보다 아웃풋이 커야 하고, 상대방과 서로 윈-윈 구조가 만들어져야 결혼에 도달할 수 있는 전략적 M&A인 것이죠. 당장 투입해야 하는 경제적, 정신적 에너지가 너무 크고, 감당해야 할 책임과 제한될 자유에 비해서 결혼을 통해 얻게 되는 감정적, 정서적 안정감은 차라리 다른 것으로 대체 가능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랑이란 감정이 무색해지는 시대입니다.
집 문제로 가면 좀처럼 답이 없습니다. PIR(Price to Income Ratio)라는 지표가 있는데요, '연소득대비 주택가격 비율'을 의미하는데, '22년 서울을 기준으로 16.9배라고 합니다. 17년 연소득을 모조리 모아야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마흔 즈음에 주택마련이 가능하다는 얘기이니, 집을 결혼의 전제조건으로 삼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초혼 연령이 늦어지고, 비혼율이 높아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신혼집은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앞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를 이상적인 주택으로 생각합니다. 17년을 꼬박 모아야 이론적으로나 가능한 수도권 집 장만, 특히 아파트는 어차피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집을 장만해서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특이한 것 중에 하나가 '남자가 집을 마련하는 문화'입니다. 부모가 자식의 집을 장만해줘야 한다는 부담감 역시 많은 은퇴 전후의 부모세대에게 큰 문제입니다. 미국이나 유럽뿐만 아니라,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조차 결혼할 때 작은 집에서 월세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남자 집안에서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도 매우 특이하고, 집이 없으면 결혼을 못한다는 생각도 그들에게는 매우 낯선 사고방식입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요.
집은 결혼의 가장 큰 장애물
전세가 문제입니다. 전세가 월세보다 상식적인 나라이다 보니, 매달 내는 월세는 아깝고, 나가지 않아도 될 돈이 새어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었을 때 월세로 독립하더라도 돈이 조금만 모이면, 목돈을 마련해 전세금을 넣고 집주인에게 월세를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을 합니다. 뭔가 뒤바뀐 겁니다. 안전한 은행에서 목돈을 빌려와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집주인에게 덜컥 목돈을 맡기고, 월세를 은행에 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금리와 전월세 전환율에 차이에 따라 유불리가 있겠지만, 큰 목돈을 어디에 써버릴지도 모를 집주인에게 주는 것은 전세가 낯선 외국인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고 불안한 시스템인 것이죠.
게다가 우리나라 집들은 원룸 아니면, 아파트입니다. 양극화되어 있죠. 혼자 사는 사람을 타겟한 원룸족 아니면, 패밀리를 위한 20~40평대 아파트가 대부분입니다. 신혼부부를 위한 적절한 주택이 많지 않은 것도 결혼을 가로막는 장벽입니다. 정부가 마련하고 있는 신혼부부 임대주택도 공급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다 보니 현실적인 선택지가 제한되고, 남부럽지 않게 시작하고 싶어 하는 뿌리 깊고 독특한 결혼 집 장만 문화와 결부되어 결혼 자체를 아예 포기하게 만듭니다. 부모세대가 느껴야 하는 죄책감은 덤입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유럽과 뉴욕의 부동산 중개인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니, 집이 참으로 다양하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30평대 아파트 하면 뻔한 몇 가지 구조가 전부인 우리나라 집들과는 대조적으로 다양한 건물, 다양한 평면, 천차만별 스타일의 집들이 다양한 가격으로 거래되는 모습을 봅니다. 지불해야 하는 가격에 비해서 너무나 천편일률적이고, 다양성이 떨어지는 우리나라 주택과 너무 비교가 됩니다. 다양성이 떨어지니, 위치와 면적이 정해지면, 가격도 예상치를 벗어나지 않게 되고요.
가장 비싼 소비재가 주택인데, 상품의 선택지가 너무 협소합니다. 개성 있고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집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공급된다면, 모두가 아파트를 추종하는 몰개성의 시대가 바뀌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작은 규모의 빌라나 소형 주택이라고 하더라도, 자쿠지가 있는 욕실, 연주가 가능한 방음실, 면적은 작더라도 취향이 강한 집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무조건 브랜드 아파트가 아니더라도, 개성 있는 젊은 부부들이 행복하게 새로운 가정을 꾸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집을 찾는 재미도 있을 테고요.
자녀가 있는 은퇴세대라면, 자녀의 경제적, 물리적 독립은 은퇴세대의 노후에 큰 변수입니다. 자녀의 미래도 불확실하지만, 은퇴세대의 미래 역시 길고 불투명합니다. 노후 자금과 노후 생활의 설계에도 매우 중요한 요인이죠. 모든 세대가 장수시대에 넉넉하기 어렵습니다. 풍요로움보다는 자기다움이 그래서 더 중요해집니다. 그러려면, 삶의 터전이 되는 주거는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 될 것입니다.
모두가 각자의 집에 만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