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시인, 나는 근시인

한 뼘 만큼의 여유

나는 원시인, 나는 근시인


큰 일이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벌써 며칠, 아니 수개월 전부터 시작된 증상이다.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들여다 볼 때 거리를 가까이하면 글씨가 물속에서 춤을 추듯 일그러져 보인다. 마치 매직아이를 보듯 시선이 혼미해지고 속도 메스꺼워지며 순간 어지러움도 느낀다. 이 현상은 일정거리 이상을 유지하면 금세 정상궤도로 돌아온다. 30cm 막대 자를 준비했다. 세상이 날 받아들이지 못하고 밀어내는 거리가 어느 정도 될까 문득 궁금했기 때문이다. 20cm가 나온다. 정확히 내 뼘으로 한 뼘이다. 난 한 뼘만큼 세상과 떨어져 있다. 한 뼘 이내로 접근하면 난 당신을 볼 수도, 읽을 수도, 찾을 수도 없다. 내가 벌써 그럴 나이가 되었다니! 서글픔이 밀려옴과 동시에 순간 거울 속에 비친 초라해진 내 모습에 떡심이 풀린다.

이런 현상을 의학적으로 원시(遠視)라고들 한다. 먼 곳은 잘 보이나 가까운 곳은 희미하게 보이는 일종의 시력장애다. 되짚어보면 난 참 눈에 대해 우여곡절이 많았다. 중2때부터 갑작스런 시력저하로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난 눈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유달리 송아지 눈 마냥 큰 눈에 영롱한 눈망울이 예쁘다며 어릴 적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듣곤 했었다. 하지만 시력이 0.3정도까지 떨어지니 칠판글씨가 도저히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나의 장점을 가려야만 했다. 당시엔 이렇듯 지금과는 달리 먼 곳이 잘 보이지 않고 가까운 곳만 잘 보이는 상당한 근시(近視)로 안경 없이는 살 수가 없었다.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누군지 알아보지 못해 오해를 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때론 “저 녀석은 어른을 봐도 인사할 줄 몰라!”라며 예의 없는 저녁으로 치부당하기도 했었다. 그때부터 안경과 난 한 몸이 되었다.

하지만 안경 착용 경험자들은 알겠지만 안경 쓰는 게 일상생활에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목욕탕 갈 때는 내 눈을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가뜩이나 희뿌연 수증기에 시선이 차단되었는데, 여기에 고장 난 내 눈까지 더해져 수족을 아예 묶어버리곤 했다. 혹시나 해서 얼굴 피부가 닳도록 눈 주위를 문질러 씻어도 보았지만 맑은 눈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군대 다녀온 사람은 모두 알고 있을 터! 방독면 착용할 때 안경은 또 다른 나의 적이다. 스피드가 곧 생명인데 거추장스러운 안경은 남들보다 최소 수 초 이상 착용을 더디게 만든다. 실제 전장이라면 이로 인해 독가스를 더 많이 들여 마셔 죽게 만들 수도 있다. 실제로 화생방 훈련 때마다 남들보다 독가스를 배부르게 마셔댔다. 청춘의 대부분을 난 그렇게 근시인(近視人)으로 살았다.

불편함이 내 일상을 지배하여 어느덧 익숙해진 33살이 되던 해, 어머니의 설득으로 안과를 찾게 된다. 사실 오래전부터 어머니는 시력교정 수술을 줄기차게 원하셨다. 하지만 당시엔 눈 수술이 그다지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절! 간호사인 여동생도 검증되지 않았던 교정수술을 득달같이 달려와 말렸다. 하지만 검진결과 다행히 수술이 가능하다며 자신감을 비추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의사선생님 뒤로 그 병원에서 시술로 거쳐 간 여러 연예인들의 사진들 속에서 강한 믿음을 갖게 되었으며, 밝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희망에 더더욱 부풀었는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라섹 수술이 진행되었다. 예리한 칼로 무뎌진 망막을 한 겹 걷어내는 제법 간단한 수술이라 한다. 뿌연 액체가 눈동자에 뿌려지고 곧이어 무섭게 옅은 기계음을 내며 뭔가가 내 눈동자에 내려앉더니 밭을 갈기 시작한다. 두려움이 어둠처럼 내려앉는다. 잠시 후 스으윽 스으윽 내 눈을 좌우로 몇 번 휘젓는다. 일부로 엉뚱한 생각을 한다. “수술 후 이제 천리안이 되면 어떡하지? 밤하늘의 우주도 망원경 없이 볼 수 있고, 해수욕장에서 비키니 수영복도..... 하하하!”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을 찰나, 집도 의사 선생님이 수술이 잘 되었다며 싱겁게 자리를 뜨신다. 이렇게 금방 끝날 수술을 그동안 20년이나 불편하게 살아왔단 말인가? 그것도 3일정도만 지나면 정상생활이 가능하다고 한다. 허무했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기뻤다.

수술 당일 밤 난 초보용접공이 걸린다는 눈 화상, 속칭 ‘아다리’의 증상처럼 쓰라림과 통증에 고통스러워 잠을 못 이루었다. 하지만 담날부터는 차츰차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렇게 3일후 난 다시 태어났다.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세상을 열어 젖혔다. 파란 하늘과 푸른 녹원의 향기가 내 몸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안경을 저 멀리 벗어 던져버렸다. 당장부터 안경 착용한 이들에게 교정수술 전도사가 되었다. 족해도 5명 정도가 내 설득에 광명을 보게 됐으니 난 그들에게 분명 인당수에 몸을 내던진 심청이 일게다. 다시 당신이 내 눈앞에 자세히 보이고, 멀리서도 바로 찾아낼 수 있고, 표정 속에서도 당신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예쁜 송아지 눈망울을 다시 들어낼 수 있었고 예의 바른 청년으로 돌아와 기뻤다. 난 그렇게 근시인(近視人)에서 정상인으로 탈바꿈의 역사를 이루었다.

그런데 12년이 지난 올 초부터 이상증상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나이가 차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세월의 선물이라고는 하나 난 전혀 달갑지 않았다. 건강검진 받을 때마다 양쪽 시력 2.0은 따 논 당상이었다. 모든 이들이 그런 내 눈을 부러워했다. 검진 실을 어깨 쭉 펴고 당당함과 자부심에 거드름 피우며 나오던 나였었다. 일상생활에 큰 불편함은 없으나 세월의 무심함에 갑자기 허탈감이 쏟아진다. 이제 점점 세상과의 시선에서 더 멀어져 갈 것이다. 그들의 시선에서 날 밀쳐낼 것이다. 유행가 가사처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렸다. 원시(遠視)는 수술 적 방법도 없다하니 온전히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있겠나! 이젠 또 다른 불편을 순응해야 하는 원시인(遠視人)으로 사는 수밖에. 한 뼘의 길이만큼 여유를 두고 살라는 하늘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한다.

돌이켜 보면 군 제대 후 난 실제 원시인(遠視人)으로 살아왔다. 일에 치여, 삶에 치여, 욕심에 치여 가까운 것을 보지 못하고 먼 곳만 바라보는 원시인(遠視人)의 삶을 살았다. 나로 인해 내 주변의 가족과 친구들은 늘 희생을 강요받거나 외면 당해왔고, 난 양옆을 가린 경주마마냥 미친 듯 앞만 보며 내달려왔다. 거친 완주 후 내게 남은 건 깊은 상처와 지친 영혼뿐이었다는 걸 알았으니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수 있으리오! 늦게라도 발견한 내 자신에 위안을 삼을 수밖에. 어쩌면 난 고대 미개 사회의 원초적 인간이었던 실제 원시인(原始人)의 삶을 살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자연에 순응하고, 내 동족을 지키고, 삶의 전쟁터에서 끊임없이 먹이를 구해야 하는 그런 원시인(原始人)의 삶! 실제 태곳적 원시인(原始人)들은 원시인(遠視人)이 아닌 근시인(近視人)으로 살았을 진데 원시인(遠視人)이라 부르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타.

근시인(近視人)과 원시인((遠視人)의 삶 중 어떤 것이 더 정답에 가까울까? 자문해본다. 정답은 없을 듯싶다. 때론 근시인(近視人)이 되기도 해야 하고 때론 원시인(遠視人)이 되기도 해야 한다. 선택에 고민스러울 때가 있으면 사랑과 우정을 기준에 두자! 그보다 우위인 가치는 없을 테니까... 난 지금껏 선택과 집중에 실패해왔었다.

이젠 제법 적응이 된 듯하다. 흐린 글씨들이 어지러워 보이는 대신 춤을 추고 있는 듯 보인다. 허상에 떠 유영하는 저 글씨들과 함께 한바탕 춤을 추고 나면 30분간 쉬지 않고 공연을 마친 오케스트라 연주자처럼 희열과 행복감에 잠시 도취된다. 갑작스레 찾아온 원시(遠視)는 내 인생에 순응과 여유를 가르쳐 주고 있다. 억지로 되는 건 없고, 시도하지 않고 되는 건 더더욱 없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내 몸을 맡기고,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피하지 않고 맞아보리! 눈 내리면 하늘 향해 입 벌려 먹어보고, 해 뜨면 따스함 곁에 잠시 쉬어가리! 그러다 그 날이 오게 되는 날, 잘 지내다 가노라며 웃으면서 떠나리. 그렇게 원시인도 근시인도 아닌 자연인이 되어 우주로 돌아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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