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 만리(牛步萬里)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우보만리(牛步萬里)


공교롭게도 출발선에 동시에 섰다. 곧 선생님의 휘슬이 울리고 둘은 뒷발로 있는 힘껏 땅을 박차며 출발한다. 다행히 볕이 구름 속에 가려있고 때마침 북풍도 불어와 경주하기 안성맞춤인 날씨다. 도보로 1시간, 속보로 45분, 구보로 30분 거리에 있는 기자능선 쉼터가 오늘 우리의 GOAL이다. 상대는 경쟁자를 잘못 골랐다.

아파트 뒤편에 북한산 둘레길 8코스 초입이 바로 위치해 있다. 8코스를 통해 은평 둘레길 탐방이 가능하며 향로봉~비봉~사모바위로 이어진 북한산 종주도 할 수 있다. 10년 전 이곳에 이사 왔을 땐 거의 매일 오르다시피 했던 이 곳을 오늘 오랜만에 홀로 올랐다. 기자능선 쉼터는 향로봉 가기 전에 있는 암벽형태의 중간 봉으로 가로 세로 50미터에 이르는 넓직하고 평평한 바위가 매력적이다. 선캄브리아시대 훨씬 이전부터 있었을 이곳을 난 홀로 평평암이라 명명했다.

상대방은 생수 한 병과 등산스틱을 갖춘 60대 이상의 노 등산객이다. 초입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출발부터 나보다 뒤쳐지기 시작한다. 벌써부터 헐떡거리는 눈치다. 눈감고 걸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리! 어찌 40대 중반의 체력이 저 분을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익히 알고 있는 길을 자신 있게 내달렸다. 비록 20여 년 전이지만 군복무시절 부하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군장 메고 밥 먹듯 산악구보를 했던 나였다. 10분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렸을까? 뒤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아 나무위에 걸터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다.

5분쯤 쉬었을까? 시야에 상대방이 들어왔다. 오! 제법인걸. 곧바로 일어나 다시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천천히 숨이 압박해온다. 입에선 마른 침이 고이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린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깎아지른 듯한 등산로 바위들은 날 밀어내고 있는 형세다. 뛰는 걸 멈춘다. 이제부턴 속보다. 다시 둘 사이의 거리를 벌리고 있다. 잰걸음으로 발을 내 딛을 최적의 땅을 계산해가며 산을 밟는다. 주변의 휘어진 나무를 로프 반동을 이용하듯 사용하며 체력소비를 막는다. 이제부턴 요령으로 오르자.

다시 10분쯤 오르니 저질 체력이 내 앞길을 가로막는다. 보이는 대로 앉아 쉰다. 에휴, 나도 생수병 챙겨올걸. 이게 뭐람? 순간 손에 들린 맥주 캔과 안주거리를 담은 검은 비닐봉지가 부끄러워진다. 이걸 마실 수도 없다. 마시는 순간 음주사고가 날거다. 잠시 쉬지도 않았는데 그 아저씨가 저만치 다시 보인다. 저 분은 지치지도 않으시나? 대체 언제 쉬시는 거야? 환장하겠다. 뒤지지 않으려면 다시 일어서야 한다. 아직 절반도 못 왔다.

내 저질체력을 맹신했던 게 문제였다. 나름 산책도 열심히 하고 골프연습도 즐겼기에 기본체력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역시 평지와 산악을 동일시 설정해선 안됐었다. 이제 부터 내딛는 내 발걸음은 의지가 아닌 근성과 오기, 자존심이 결합된 무의식의 행진이다. 꾸역꾸역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이제 아저씨와 나 사이의 거리는 약30여 미터로 더 이상 좁혀지거나 멀어지지 않는다. 아저씨의 페이스는 줄곧 시작점과 같은 듯 보였다. 스피드를 높이지 않고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떼고 있었다.

이제 목표지점의 4분의 3을 왔다. 급히 올라온 통에 산 아래의 전경도 감상 못했다. 나 혼자 시작한 아저씨와의 경쟁심에 일요일 느긋하게 산행이나 다녀오자 라는 나의 생각은 헝클어지고 말았다. 이제 손에 잡힐 듯 목적지가 눈에 잡힌다. 하지만 후들거리는 다리에, 방독면을 뒤집어 쓴 것 같은 호흡에 내 상태는 문자 그대로 최악이었다. 그사이 아저씨와의 간격은 바로 1미터 뒤편 까지 좁혀져 있었다.

스포츠맨쉽에 어긋나게 마냥 등산로를 점령하며 오를 수 없었다. 스피드 스케이팅에서도 선두주자는 후발주자가 바로 뒤에 따라 붙으면 사이드로 비켜나 길을 터주어야 한다. 아저씨의 보폭과 스피드를 유지하며 근근이 앞서가던 난 결국 목적지 100미터를 앞두고 길을 내주고 말았다. 한 발만 더 뗐다간 죽을 것 같은 임계점에 이를 때였다. 눈앞을 묵묵히 걸어가는 아저씨의 등 뒤를 그 자리에 주저앉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아저씨는 그냥 가던 길을 본인 체력에 맞추어 갔을 뿐이고 난 제풀에 녹다운됐을 뿐이다.

우보만리(牛步萬里)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소의 걸음으로 묵묵히 걸어가면 만리(萬里)를 갈 수 있다는 격언이다. 난 오늘 어릴 적 이솝우화에서 배운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경험했다. 꾀돌이 토끼였던 난 잔꾀를 부리며 초반부터 오버페이스를 하며 달리다 결국 거북이 아저씨에게 지고 말았다. 시작 전 토끼띠 아니랄까봐 기어코 토끼 역을 고집했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거북이였다. 이변은 없었으며 예상대로 연극은 싱겁게 막을 내렸다. 구보만리(龜步萬里), 토보십리(兎步十里)! 현인들의 격언대로 된 셈이다.

인생도 결국 마라톤과 같다. 기본체력에 페이스 조절은 필수이며 함께 달릴 동반자도 필요하다. 오늘 난 그 페이스조절에 실패했다. 아저씨처럼 오버페이스하지 않고 내 체력대로 올랐으면 충분히 정상을 먼저 찍었을 것이다. 자만, 방심, 건방에 늘어진 나머지 내 꾀에 내가 넘어가고 말았다. 또한 맘가짐도 틀려먹었다. 산에 오르는데 맥주가 웬 말인가? 끝까지 겸손하지 못했다. 호흡은 늦추되 긴장을 놓진 말았어야 했다.

그래도 산은 인자했다. 이런 날 두 팔 벌려 환영해줬다. 기자촌 쉼터의 평평암은 한결같은 맘으로 그 자리에 서서 산을 찾은 이들에게 쉼터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그 바위 한가운데서 자라고 있는 자그마한 소나무도 제법 많이 자라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저 아기소나무는 북한산의 영물로 자리 잡으리라. 그제야 자연과 도시가 조화를 이룬 아랫동네 서울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경주가 끝나니 이리도 맘이 편할 수 없다. 경주는 졌어도 오늘 인생의 진리를 배울 수 있지 않았던가? 또 세상이 내 발아래 있지 않는가? 산에 오르기 전 잡히던 한 겹의 뱃살도 어디로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내려갈 땐 우보만리(牛步萬里)의 맘가짐으로 하산하리라. 북한산과 내가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루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