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역사여행 0] 당신의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당신이 지금 걷고 있는 모든 걸음, 걸음은 역사입니다.

by 김하종

나홀로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다니기를 좋아합니다.


이 세상에 의미가 없는 공간이 어디 있겠냐만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공간을 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역사적 의미가 충분한 공간들을 걷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벽돌 하나, 나무 한 그루가 말을 걸어옵니다.


어디선가 말없이 내미는 수많은 얼굴들을 마주합니다.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 속에서 존재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평소 역사적 사건이나 장소와 함께

주요한 인물들 몇몇을 기억하는 데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어떤 역사도 주요한 인물 몇몇 이서 만들어 낸 것은 없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을 벌벌 떨게 했던 거북선을 설계한 건

이순신 장군과 나대용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이었을지는 몰라도

나무를 깎고 판자를 얹어 망치질을 했던 목공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거북선은 역사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귀선이 출정하여

당포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밤낮없이 매일같이 훈련하고 연구했던

수병들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포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도록

장전과 사격연습을 수도 없이 했던 포병들과

갑판 아래서 손이 불어 터져도 헝겊으로 칭칭 감아

정확한 방향으로 배를 나아가게 했던 격군들.


그들이 없었다면 조선 수군은

역사에서 영영 사라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세상에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사람이 아닌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근대적 법체계 안에서

'합리적인 인간' 범주 안에 들지 못해

인간으로서의 마땅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장애인, 여성, 청소년, 학생 등 사회에서

소수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며 신분상으로는 양인에 속하였으나

세습적으로 천역(賤役)에 종사하는 신량역천(身良役賤)이었던

격군들의 삶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삶 하나하나에 주목하다 보니

문득 '나'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고민하고,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욕먹고 구박받으면서 때론 정말 하기 싫어하면서도,

주먹밥 하나 손에 들고 탁주 한 사발 마시며 금새

꾸역꾸역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는 모습들을 한 번 보시지요.


우리네 인생과 상당히 많이 닮아있지 않나요?

훨씬 정감이 가지 않나요?

사람 냄새가 폴폴 나는 역사야말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 낸 역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나'가 모이고 모여 만들어 낸 역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곧 우리의 역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듯 보이는

나의 인생마저도 역사의 일부분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홀로 정처 없이 그 길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말없이 내미는 수많은 얼굴들.

그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 낸 길이겠지.

다시 나의 일상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찰나,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걷고 있던 이 길이
수많은 나의 인생길이었음을.

- 김하종, <나홀로 역사여행> 中

참고 : 김하종의 브런치, https://brunch.co.kr/@hajongkim20/21


우리는 이 시점에서

각자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진지한 물음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역사는 무엇입니까?"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 눈내린 들판을 걸어갈제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 서산대사(1520~1604), 눈내린 들판 함부로 걷지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