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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종 Jan 24. 2021

쉼의 자격

왜 그렇게 쉼표 하나 찍는 일이 어려웠을까?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자취방에서 하루 종일 누워서 잠만 자는 인생은 정말 의미가 없을까?"



대학시절 한 동기가 제게 던진 물음이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꿈꿨던 캠퍼스 라이프를 즐길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대학만 가면 살이 빠진다느니, 대학만 가면 완전히 인생이 바뀔 것처럼 유혹하던 어른들의 거짓말이 깨지는 데까지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대학 입시라는 정체모를 목표를 향해 경주마처럼 달려온 지난 시절을 되돌아볼 여유도 없이 학점과 취업, 20대에게 주어진 또 다른 실체 없는 목표를 향해 뛰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되도록 덜 흔들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겠지요.


요즘엔 사춘기보다 오춘기, 육춘기가 더 무섭다고 하더군요. 어린 시절 충분히 방황하지 못한 사람들은 긴장해야 합니다. 언제고 인생이라는 깊은 고민 구덩이에 빠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취방에서 하루 종일 누워서 잠만 자는 인생에서도 의미를 찾기를 바랐던 그 친구의 마음은 아마도 잠시 쉬어갈 시간이 필요하다고 내 몸이 보내는 SOS 신호였을지도 모릅니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순간마다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상당히 피곤한 일입니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왔다고들 하지만 그 사명을 깨닫게 되기까지 우리에게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이 명료하게 적힌 체크리스트를 받아 들고 이 세상에 나오는 건 아니니 말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쉬어갈 시간은 아주 절실합니다.

그럼, 대체 쉰다는 건 무엇일까요?


쉰다는 건

때 묻은 페르소나를 벗겨내고

본래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정말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게 정말 있다면 우리 인생에 쉼표 하나쯤은 필요합니다.


쉰다는 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기뻐하는 일입니다.

쉬어갈 시간이 있어야 내 삶에 감사할 시간도 생기는 것이겠죠.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지 마세요.

낭떠러지로 질주하는 줄도 모르고 뛰고, 뛰고, 또 뛰다가

나중에 후회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한 번 사는 인생,

내가 살아있음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쉰다는 건

일하지 않고도 모두가 함께 먹을 수 있는 일입니다.

서로가 고통받지 않도록 베풀어 주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도 되돌아볼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주변 사람을 돌볼 여유가 생길지 만무합니다.

가족이 해체되고 직장에서 팀 내 불화가 생긴다면

그 구성원들이 진정 '쉼'을 보장받고 있는지를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일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먹고 살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나서서 보장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병들어가고 있다고 느낀다면

더더욱 '쉼'의 절실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쉼'은 '베풂'의 충분조건입니다.

다만 그 '쉼'이 참일 때만 가능하지요.


제대로 쉬어야만 일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학창 시절 꼭 쉬는 시간에 공부하는 애들이 공부를 못한다던 말은

적어도 이 사회에서 거짓말입니다.


쉬는 시간, 자투리 시간마저 전부 할애해서 공부해야만 하고,

꼭 써야 할 휴가마저 반납하고 일해야만 제대로 살 수 있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지요.

더 잘 살아보려고 일터에 나갔다가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거나

일하다가 다쳐도 해고당할 걱정 때문에 치료도 못하고 출근해야만 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지요.

노동하지 않으면 굶어 죽고, 노동하면 지쳐 죽는 사회를 두고

절대 정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쉴 거 다 쉬면서 어떻게 돈을 버냐는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쉴 거 다 쉬면서 돈을 벌고 싶다는 말이 아닙니다.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진정

쉰다는 건 바로,

그런 일일 테지요.   


진정으로 쉰다는 건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누구나 사람대접 받으면서

사람 사는 세상을 사는 일이 아닐까요?


인간으로 태어나

나에게 '쉼표' 하나쯤은

마음대로 찍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에게 주어진 '쉼의 자격'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의 생을 온전히 살아내고 있는 나 자신뿐이니까요.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제대로 쉴 줄 아는 방법을 터득하는 일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나에게 '쉼표' 하나쯤

제대로 "뽝" 찍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나의 쉼이 중요한 만큼

누군가의 쉼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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