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유배지의 저녁

끝내 한 사람의 곁으로

by 김하종

이름은 벗겨지고 자리는 거두어져도

끝내 물러나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

말 대신 밀어 두었던 한 사발처럼.




강은

높은 데서 떠내려온 것들을

오래 품지 않았다



물비늘은 비단보다 먼저

호명을 적셨고

멀리까지 번지던 칭호는

섬 끝에 닿자

겹겹이 벗겨졌다


그가 처음 들어오던 날

예를 갖추는 법보다

문소리마저 그를 놀라게 하지 않도록

더 마음을 기울였다



산으로 둘린 마을에서는

큰일도 마침내

부엌 연기 옆에 내려앉기 마련이라


아궁이에 마른 가지를 넣고

김 오르는 사발을 밀어 두고

밤기운이 사나워지지 않도록

뜰을 여러 번 쓸었다


들리는 말은 늘

무너진 자리 쪽으로 먼저 기울지만

정작 그런 뒤에야

비로소 눈에 밟히는 것들이 있다


말끝을 잃은 입가,

잠결에도 풀어지지 않는 미간,

다정보다는

겨우 하루를 건너는 쪽에 가까운 기색


그는 자주

물가 쪽을 오래 바라보았다

되짚을 수 없는 곳은

대개 눈보다 먼저

팔다리가 알아채는 법이어서


나는 캐묻지 않았다

무엇이 비워졌는지

누가 앗아 갔는지

답을 세울 수 없는 슬픔 앞에서는

입을 덜 여는 일이

오히려 오래 남는 위로가 되므로


대신

새벽마다 물동이를 채워 두고

바람이 드센 날이면 문살을 덧막았다

한 목숨이 너무 쉽게

서늘해지지 않도록


세상은

그의 자리부터 거두어 갔지만

모두 쓸어 가지는 못했다


한 생이

다른 생 옆에 오래 머무는 일


역사는 늘

높은 곳에서 마른 붓끝으로 적혔으나

삶은

낮은 처마 밑에서 가까스로 이어졌다



그러니 마지막에 남는 것은

옥좌가 아니라

말 대신 밀어 두었던 한 사발이다


임금을 버린 밤은 많았으나

한 목숨을 끝내 놓지 않던 손길 하나가

여전히 끝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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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기후정의 활동가로 살고 있습니다. 세상 곳곳에 아프고 힘들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곳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들려줄 사랑 이야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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