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간의 법정에서 기록한
여성 인권 투쟁기를 읽고

한겨레출판 <아주 오래된 유죄> 서평단

by 김하종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산다는 형량에 대하여”

‘낙태죄 위헌’ 이끈 변호사 김수정이 법의 언어로 말하는 페미니즘


지난 20년 법정에서 기록한 여성 인권 투쟁기, 어떻게 법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외면해왔는지를 볼 수 있다. 읽는 중간중간 책을 덮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법과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너무나 이중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이중적이고 폭력적이었던 그 시선들은 한 인간을 기어코 파멸로 몰아갔다. 그리고 그 이중적인 태도는 지난 11월 15일 신촌 유플렉스에서 진행했던 낙태죄 폐지 집회를 방해하러 온 극우 유튜버들의 논리와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미성년자는 미성숙하여 어른이 보호, 양육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인 남성과의 성적인 문제로 얽히면, 남녀 간의 사랑에 따른 성적 자기 결정권의 행사로 둔갑한다(남성이 유리할 때만 보장되는 아이들의 성적 자기 결정권, 61~67쪽).


국가의 사정, 아들을 낳아야 하는 집안의 사정 등 저마다의 사정을 들이대며 낙태를 종용하고 허용해왔지만, 오직 여성의 사정, 여성의 결정에 의한 낙태만을 기를 쓰고 금하려 애쓴다(상속 자격 박탈을 위해 며느리를 고발한 시아버지, 136~140쪽).


하지만 섣불리 책을 덮을 수 없었다. 남편에게조차 성희롱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 채 오직 친구 한 명에게만 피해 사실을 토로하며 혼자 전전긍긍했을, 나 홀로 힘든 싸움을 이어가다 목숨을 끊은, 그들의 생을 눈 앞에 두고서 차마 도망갈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며 내가 느끼는 불편함 또는 힘겨움은 어쩌면 나를 비롯해 여성에 대한 공공연한 폭력들을 외면했던 모든 이들의 민낯을 까발리는 일이기 때문일 거다.


지난 2018년, 해시태그 미투 운동으로 온 나라를 뒤흔들 때, 막연히 대단한 용기 있다고 생각하거나 드디어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생각 밖에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느 여성들은 각계각층에서 이어진 여성들의 성희롱, 성폭력 피해 사실 고발과 이에 연대하는 해시태그 미투 운동을 보면서 격려의 박수를 치기보다 눈물을 흘렸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전히 여성의 삶은 고단하다는 사실과 오직 위안이 되는 것은 ‘나도 겪었다’고 외치는 슬픈 연대라는 사실 때문이다(직장 내 성희롱이 불러온 죽음과 공무재해, 43~45쪽).


혹자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아직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는 것이 너무도 어렵다. 11.15 낙태죄 폐지 집회에서 극우 유튜버에게 들었던 소위 ‘보빨러’ 따위의 저급한 공격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나 또한 20여 년간 한국에서 가부장적인 집안의 보호 아래 남성 권력 사회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온 대표적인 지정 성별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온 나의 섣부른 위로나 관심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지난날 실제로 성폭력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도 그러했지만, 아직도 앞으로 똑같은 일을 맞닥뜨리는 상황이 다시 온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오직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끊임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노력을 꾸준히 하는 일뿐이다. 어쩌면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노력을 멈추는 순간 나는 이미 그 모든 폭력에 동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오래된 유죄>는 권김현영 선생님의 추천사처럼 ‘페미니즘 입문서’를 찾는 이들에게 자신 있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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