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많은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안정적이지만 불행한 직업과 행복하지만 불안한 직업을 두고서 고민하기도 하고, 경제적 생존과 인간적 실존 사이를 깊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젠 코로나 19를 넘어 기후생태위기로 인한 인류 생존의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소위 엘리트의 삶 보다 자유롭기를 택했던 해방촌장 전범선은 자유를 쫓는 만큼 자유를 잃는다고 말한다. 나와 타자가 결국 하나이고, 타자의 자유 없이 나의 자유도 없다고 믿으면, 타자의 해방을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는 순간 나의 자유란 곧 책임이 된다.
그는 자유롭고 싶지만 무책임할 용기가 없다. 수많은 동물들의 고통과 기후생태 위기 앞에 눈을 돌릴 자신이 없다. 숱한 역사에서 온갖 해방을 외친 운동가들의 삶이 그러했을 거다. 그렇게 인류는 자유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며 인간해방, 민중해방, 민족해방, 노예해방, 노동해방, 여성해방, 성소수자 해방, 동물해방과 종해방을 향한 여정으로 나아갔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 자유는 명사였고, 에리히 프롬의 능동적 자유가 동사였다면 전범선의 자유는 부사다. 자유란 얻고 싶은 어떠한 대상도 아니고, 하고 싶은 특정 행동도 아니다. 그저 ‘자유로이’ 살고 싶다. ‘휘뚜루마뚜루’ 자연발생적인 행위를 이어갈 때 비로소 자신 본연의 모습에 다가간다고 여긴다.
어쩌면 인간에게 불확실성은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토록 맹신하는 경제학은 어떠한가? 경제학자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상정하고 접근한다. 단순화하고 획일화하여 일반화한다. 그래야만 법칙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학자의 예측은 일기예보보다 부정확하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억지로 답을 찾으려고들 하지만 역설적으로 단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한다면 오히려 자유는 없다. 다름을 쫓을 수 있어야 삶의 선택지가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반듯한 것을 만들려면 모난 곳을 깎아내야 한다. 하지만 전범선은 그것을 거부한다. 자유롭기 위해 삐뚤어지기를 추구한다.
우리 사회는 보다 삐뚤어져야 한다. 자유로워져야 한다. 하나의 답 만을 주야장천 외는 사람보다는 ‘노답’인 사람이 필요하다. 예측할 수 없고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필요하다.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가 믿어왔던 모든 가치체계들이 모조리 박살 나고 있다. 무한 성장의 신화도, 지구촌을 꿈꿨던 세계화의 꿈도 산산조각 났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끝없이 욕심부려도 ‘보이지 않는 손’이 아름다운 균형을 잡아줄 거라는 전 인류적인 신앙은 6번째 대멸종과 2050 거주 불능 지구를 앞당기는데 일조하고 있을 뿐이다. 체제가 흔들리면 민중은 대안을 찾았다. 1차 대전 이후 러시아는 공산주의, 이탈리아는 파시즘을 택했다. 독일 국민은 대공황 때 나치당을 선출했다.
더 이상 옛날 얘기가 아니다. 코로나 19로 정부가 무소불위의 힘을 얻고 있는 지금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기후생태위기를 빠르고 확실히 해결하겠다는 전체주의가 곧 인기를 얻을 것이다. 이미 서양에서는 에코 파시즘이 등장했다. 우리는 다시금 자유주의의 위기를 목도하고 있다.
코로나 19 이후의 자유를 지켜 내기 위해 우리는 더 삐뚤어져야 한다. 예측 불가능한 전 지구적 재난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삐뚤어진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재난은 긴급하고 총체적인 변화를 정당화한다. 이 말인즉슨 그 어떤 변화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세계는 이제 기후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비상사태에 걸맞은 비상한 행동을 요구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다.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동안 우리는 자유를 찾아 헤맬 수 있는 그 자유마저 영영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