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서 나를 발견하다
사진 출처 : 다음 책
* 매일 하나의 리뷰(혹은 글쓰기) 18일 차
* 본 리뷰에는 주관적인 견해가 들어있습니다.
1. 들어가며
문득 의문이 하나 들었다. 나는 왜 브런치에 글을 쓸 때 1. 들어가며 라는 글자를 쓰는가 하고 말이다. 습관이라면 습관, 루틴이라면 루틴. 그냥 늘 해오던 거니까.
이 글은 '학곰군'이라는 계정에서 85번째로 등록되는 글이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 '1. 들어가며'라는 말이 들어간 58번째 글이다. 퍼센트로 환산하면 글을 쓸 때 68.2%의 확률로 1. 들어가며 라고 쓴 셈이다. 이제는 1. 들어가며 라는 말이 너무 익숙해진 것인지 방금 타이핑을 하는 순간에도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1. 들어가며는 '보통' 내가 글을 쓸 때 쓰는 포맷이 되었고, 당연히 써야 하는 말이 되었으며 쓰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의 힘 있는 말이 되었다. 한 단어가 가장 영향력 있게 사용되는 순간은 방금 읽었는데도 기억에 남지 않고, 방금 들었는데도 그 단어를 말했었는지 인지조차 하지 못할 때다.
2. 보통, 평범, 일반, 노말, 정상
<편의점 인간>의 주인공 후루쿠라는 보통, 평범, 일반, 노말, 정상의 범주에선 벗어난 인물이다. 삼십 중반까지 구직활동 없이 편의점에서 일하고, 이렇다 할 이성교제 경험도 없다.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도 부족하고 그의 생각과 판단은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에 어긋나 있다.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후루쿠라는 비로소 세상에 편입될 수 있었다. 매뉴얼대로 행동하고, 동료들의 말투를 연구하여 '보통 사람 코스프레(!?)'를 하면서 그는 '사람'이 된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그녀를 배제한다. 그녀도 알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이물질'처럼 다룬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평범해지려고, 정상이 되려고 자신을 교정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도록 이따금 보이지 않는 '정상인 가면'을 쓰고 행동한다.
한국에서는 의무교육을 한다. 초, 중, 고를 거치며 도덕 교과서에 있는 '사회화 과정'을 밟는다.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지,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몸으로 체화한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알게 모르게 '배제'도 습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3.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작가 무라타 사야카가 '이물질'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소설 속 인물들이 반복해서 끌어오는 조몬시대(선사시대)부터 배제는 체화되어왔다.
선사시대에 인간은 생존이 최우선의 과제였다. 지금의 인간들이 느끼는 먹고사니즘과는 다른 차원의, 잡아먹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매일 고민해야 했다. 살기 위해, 종족 번식을 위해 불확실한 현재와 미래와 싸워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생존과 거리가 먼 위험요소들을 제거해 나갔다.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무리 생활을 하고, 정착 생활을 했으며 도구를 사용했다. 그러나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가 있다면 과감히 배제했다. 국사책에 나오는 '고조선(청동기임ㅎㅎ)'의 8개조 법만 보더라도 도둑이나 살인자에 대해선 엄격히 처벌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타인의 권리(재산, 생명)를 침해했다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당장 오늘내일 죽고 사는 문제와 연결되었기에 '이물질'들을 배제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1세기의 인간은 인간의 본성과는 먼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물론 이 말이 모든 사람들을 대변하는 말은 아니다.) 내가 당장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호랑이한테 물려 죽을 확률은 현저히 낮아졌다는 말이다. 다만 '사회'라는 세상에 편입하여 '그 안에서'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고민하고, 시간을 투자해 노력하고, 상상한다.
인간은 '무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존을 위해선 얽히고설킨 관계를 버텨내야 한다. 그 관계를 이해하고 습득하는 과정이 사회화이고, 사회화를 해야 생존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 과정에서 선사시대 때나 있었을 법한 배제의 논리는 다시 부활한다.
범죄든 방화든 어떤 사건이 있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쉬운 방법 중 하나는 배제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을 미친놈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어떤 미친놈이 그 일을 저질렀어!라고 말을 하면 하... 무섭다 라든지 이런 미친놈! 이라든지 하는 반응을 하기 마련이다. 설정된 미친놈이 정말 미치광이인지 아니면 정상인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 된다. 미친놈이라는 말은 조현병이 될 수도 있고 빨갱이가 될 수도 있고 사이코패스가 될 수도 있다.
'나'에게서 미친 사람을 뚝 떨어뜨려 놓으면 비로소 나의 생존은 보장된다. 위험요소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미친 사람이 나와 엮여있거나 주변의 인물이면 한 없이 두려워진다. 생존에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위험요소'가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타인에게서 나를 발견하다.
나 아닌 것들에서는 손쉽게, 많이 배제를 할 수 있지만 인간이 평생 제 얼굴을 볼 수 없듯이(거울이나 사진, 물에 비친 얼굴은 거꾸로 된 상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타인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 것 같아?'라고 물었을 때 예상과 다른 반응이 나오는 것은 내가 하는 말과 행동과 태도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상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따금 내가 하는 행동이 내가 부정하고 싫어하던 부모님의 행동과 비슷할 때, 그것을 자각할 때 온몸이 소름이 돋곤 한다. 나는 전혀 몰랐던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경험이다.
내가 '싫어하는 부모의 상'을 배제만 할 줄 알았지, 나 자신도 '배제가 될 존재'였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편의점 직원 후루쿠라가 주변 직원들의 말투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말투를 형성하듯이, 인간은 타인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순수한 나라는 허상을 설정해놓고, 나 아닌 것들을 배제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그 논리라면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배제당하는 존재이고, 위험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객관적으로 타인을 봐야 한다. 보기 싫은 타인의 행동이 어쩌면 내가 끊임없이 배제하고 싶어 하던 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