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과 관심과 비교
출처 : 알라딘
*보고 듣고 읽어 기록하기 28번 째.
*본 리뷰에는 주관적인 의견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1. 들어가며
몇 년 전 글을 쓰는 모임에서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글은 어찌되었든 사람의 이야기지.
어떤 맥락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때 그 한 마디가 멋있어서 가슴에 남아버렸다.
사람의 이야기. 이 말에서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다. 쓰는 이도 사람이고 읽는 이도 사람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지키는 일은 쉽지가 않다.
언어의 온도는 지극히 당연한 '사람의 이야기'다. 밑줄을 긋고 싶을만큼 잘 빠진 문장이나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극적인 스토리가 없어도 가슴을 울리는 건 그런 이유가 아닐까.
2. 관찰하는 이야기
언어의 온도엔 저자 이기주의 경험이 많이 실려있다. 지하철, 버스에서 본 것. 걷다가 벤치에 앉은 사람에게 들은 일. 동료가 한 말 등 어쩌면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에피소드들이 있다.
저자는 관찰한다. 귀를 열고 세상의 소리를 담아 두었다가 자신의 통찰과 함께 에세이로 풀어낸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관찰은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책 한 권이 나오기까지 그는 자신과 주변 사람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갖고 관찰을 했다는 것이다.
그의 관찰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애정을 전제한다. 애정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니, 돌아오는 피드백도 사랑일 수밖에.
3. 관찰과 비교
타인을 의식하고 관심을 갖고 관찰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관찰은 필연적으로 '나'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나'가 확실히 서 있지 않는다면, 관찰은 비교가 되기 쉽다. 불완전한 나의 위치를 정의하기위해 타인을 타인으로 보지 못한다. 나 '보다'나은가 나'만큼' 되는가 나도 모르게 계산을 한다면 그 관찰은 실패한 셈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관찰을 하지 못하는 부류다. 사랑스러운 시선을 보낼수도 타인을 있는 그대로의 그로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내가 이렇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는 것이다.
쿨하게 너는 너. 나는 나. 하는 줄만 알았다. 스타일이 다른 걸 이해해! 라고 말은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공허한 말 뒤에 상대의 모습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내가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지독한 나르시스트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나는 나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00한 내가 좋고, 00한 내가 싫다는 기준도 없이 그저 버티듯 살아온 것 같다.
관찰하지 않는 삶. 나 자신조차 관찰하지 않는 삶은 텁텁했다. 외로우면서 외로운지도 몰랐고, 좋아도 좋은 줄 몰랐다. 그래서 웃을 줄을 몰랐다. 울기는 잘도 울었다. 우는 순간만은 나는 나를 관찰할 수 없고, 남들은 나를 관찰할 수 있으니까.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 아니 나 자신에도 관심없이 살면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논하는 건은 참 우스운 일이다. 늦되게 관심이며 감정이며 말하는 꼴도 참 우습기만하다.
그러나 참 다행이다. 너무 늦기 전에 생각이라도 할 수 있다니! 너무 늦기 전에 주변에 관심을 갖고 바라볼 세상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애정어린 시선은 조금 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사람의 이야기. 그래도 사람의 이야기.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나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