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시+만화] 구체적 소년

시 만화, 그리고 어긋남의 즐거움

by 이요마
구체적 소년(2017)

사진출처 : 알라딘


* 다시, 매일 읽고 기록하기 4일 차

* 이 글은 주관적인 의견이 담겨 있습니다.



1. 들어가며


시인과 만화가가 만났다. '시인 X 만화가 = 만화시편' 또는 '그래픽-포엠(graphic-poem)' 이라고 뒷표지와 책날개에는 쓰여있다. (다른 사람은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생전 처음 보는 형식의 문학이었다.


만화시편이든 그래픽-포엠이든 시 만화든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러한 새로운 시도가 놀랍고도 반갑다.


'시' 하면 떠오르는 감각은 대한민국 국민 열에 아홉은 '윤동주'나 '김소월'일 것이다. 조금 더 확장하면 '이육사'나 '정지용'일 것이고, 더 확장하면 '한용운'과 '서정주', '김지하'까지 거론될 것이다.


수능 세대인 나는 이러한 시인들이 쓴 시를 보면 본능적으로 정리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눌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상승이냐 하강이냐, 어조는 어떻냐,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느냐(주제가 뭐냐) 등 속된 말로 아다리를 맞춰가며 네모 박스에 시를 도식화했다.


나는 어찌어찌하다 보니 대학을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게 되었고, 하필이면 첫 전공수업을 '시' 수업을 듣게 되었다. 시 담당 교수였던 J 선생님은 첫 시간부터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사실 별것 아닌 이야기였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나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말은


시인도 사람이다.라는 한 마디였다.


J 선생님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여러분이 몇 살 이죠? 스물하나? 스물둘? 많아야 스물다섯이겠지. 윤동주가 시를 몇 살 때 썼나요. 여러분 나이 때 쓴 거예요. 치기 어리고 서투른 여러분 같은 이십 대에 쓴 거란 말이죠. 수능을 칠 때는 윤동주 하면 어떻게 배우나요?"


그의 질문에 나는 턱 밑까지 '애국'이라는 단어가 올라왔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무릎을 치면 다리가 올라가는 무조건 반사처럼 '윤동주= 애국, 반성적'이라는 공식이 머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강의실 뒤편에서 '애국이요.'라는 말이 나왔고 J 선생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렇지'라고 말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윤동주는 내 나이 때 저런 대단한 시를 쓰는데, 천재다. 위인이다.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윤동주는 태어나서부터 시를 썼을까요? 평생을 24시간 애국만 생각하면서 광복에 힘쓰다가 죽었을까요? 아니에요. 윤동주도 여러분 같은 이십 대였어요. 찌질한 짓도 하고 궁상도 떨던 여러분 같은 사람이에요. 위인이 아니라."


3년 전의 기억을 꺼냈기에 정확한 내용은 아닐 게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전하려던 메시지는 지금도 또렷하다 '윤동주도 사람이다.', 그리고 '시인도 사람이다.'


여태까지 내가 봐온 수많은 문제집 속의 시들도 결국 사람이 쓴 것들 일 게다. 다만 내가 '도식화'라는 프레임으로 시를 '해결'하려고 했기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 뿐.


2. 어긋남의 즐거움


시, 더 크게는 문학이라는 것이 결국 '사람이 쓰는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는 얼마나 허무했는지 모른다. 십여 년간 쌓아 올린 지식이라는 것이 단 한순간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내가 아는 시인이 열 손가락에 꼽는다는 사실도 놀랐다. 매년 문예지, 신춘문예, 추천 등으로 시인들이 등단을 한다. 윤동주, 이육사, 한용운 말고도 수백 명의 시인들이 대한민국에 있다. 그것도 우리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참고로 이 책의 저자 서윤후 시인은 90년 생이다.)


<구체적 소년>은 서윤후 시인의 시를 노키드 만화가가 만화로 그려내는 작업물을 담았다. 책의 구성은 만화-시(원본)-시인의 말 순이다.


이 책에서 가장 특징적인 대목은 아무래도 '만화'겠지만, 읽는 동안 내가 가장 재밌었던 부분은 '시인의 말'이었다. 나는 시집을 잘 읽지 않는다. 시를 싫어하거나 기피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는다. 감수성이나 공감능력이 부족해서일까 '시의 언어'가 가진 모호성, 추상성에 대해 갑갑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갑갑함은 '적확'하지 않은 표현 때문일 텐데, 문제는 해설을 듣고 나면 그보다 더 적확할 수 없는 표현들이라는 사실이 날 더 갑갑하게 만든다. 무언가 빠진 듯 비어있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공백을 보고 있노라면 이해는 할 수 없고 머리는 멍해지고 한없이 막연해진다. 그러나 어쩌다 한 번 우연히 느낌표가 딱 뜨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럴 때는 내가 천재라도 된 것마냥 더없이 충만해진다. 문제는 거의 대부분 느낌표는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화는 이런 시의 공백과 모호성을 구체화한다. 물론 이 그림들이 시를 정확하게 읽어내거나 시 전체를 대변한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해를 돕는 예시 혹은 가이드라인 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어떻게 읽어야 해!'라는 태도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지 시를 읽는 태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다. 보는 사람마다 정답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시인의 말'은 시집의 특이점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작품 후기' 혹은 '생각 노트'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는데 시인 본인이 어떤 생각을 하며 시를 써 내려갔는지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혹자는 작가가 '이러저러한 의도로' 썼는데 시를 어떻게 읽어야한다고 정답을 제시한 것 아니냐 라고 물을 수도 있다. 허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창작자의 의도가 어떠하든 한 가지 의미로만 읽힌다면 그 작품은 썩 좋지 않은 작품이라고 말이다.(물론 추모시나 특정 목적을 가진 작품은 논외로 두겠다.)


'시인의 말'이 재미있던 이유는 바로 생각의 '어긋남'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며 A를 상상하면서 책장을 넘기면 전혀 생각도 못했던 B라는 시인의 창작 배경이 나타날 때, 그 어긋남이 신선했다.


시인의 말을 퀴즈 맞추듯 정답을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와 비슷한 혹은 전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보며 '이렇게도 생각하는구나!'하고 받아들이는 것. 귀를 열어 온전히 상대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것이 이 책을 보면서 느끼는 어긋남의 즐거움이 아닐까.


시, 여전히 잘 모른다. 다만 시인도 사람이라는 것, 저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궁금해하고 귀를 열어두는 것. 그게 시를 읽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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