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나'는 진짜 '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 다시, 읽고 기록하기 9일 차
* 연재까지는 아니고, 가급적 자주 업로드
* 주관적인 의견이 들어있습니다.
1. 들어가며
'자기애'를 해야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좋아해보려는 사람이다.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올해 초부터는 좋아해보려고, 사랑해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사실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 메카니즘이어야 겠지만 나는 인위적으로, 시간을 내어서 해야만 했다.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지금은 느슨하게 쓰지만 매일 책, 영화, 드라마 등을 보고 리뷰를 하던 4월, 글을 쓰고 퇴고를 하다가 문득 발견한 것이 있었다.
'나는'이라는 주어에 가장 많이 쓰는 서술어가 '생각하다'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순간 퍽 놀랐다. 나는 평소에 스스로를 '별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나에 대해 얘기할 때 '난 생각하는걸 별로 안 좋아해!'라고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굴려 계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생각은 과하게 많이 하고 있더라.
이 경험을 하고 나서는 '내가 아는 나'가 사실은 진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 내가 생각한 나는 내가 아니다.
<자기미움>은 필로 이경희 님이 쓴 일종의 마음공부 책이다.(이 책은 브런치에서 연재하다가 출판까지 이어진 케이스라고 한다.)
책에선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나'에 대한 오해를 걷어내는 작업을 한다.
좋은 내용이 많지만 내가 가장 기억나는 부분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당신의 생각, 성격은 삶의 도구일뿐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질투와 부러움은 우월감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이었다.
먼저 전자는 내가 갖고 있는 생각들, 나의 성격은 그저 도구일뿐 나의 행동의 가이드라인이 되어선 안 된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나는 소심하니까 남들 앞에 나서는 영업직 일은 못할 거야. 나한텐 연구직이 어울려. 라고 '생각'했다고 가정해보자.
(이게 책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알아서들 필터링해서 읽으시길)
여기서 나는 '내 성격은 소심해.'와 '영업직보다는 연구직이 어울려.'라는 두 가지 '생각'을 한다.
그런데 내 성격이 '소심한 지' '정말로 연구직에 어울리는 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나 스스로 선을 긋고 한계점을 정할 필요는 없다. 생각은 생각일뿐, 성격이나 성향도 고려할 참고사항일뿐 나의 행동이나 선택에 있어서 '그렇게 해야만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대개 '눙치고 넘어가는 태도'때문에 생긴다. 내가 아는 나는 이러저러 해 하고 넘어가는 태도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거울을 보거나 사진을 찍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나의 실체를 직접 들여다보고 정확히 파악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이 많은 이유는 보고싶지 않은 나 자신을 보는 대신 생각과 상상으로 그 자리를 메운건 아니었을까.
때문에 실제와 내가 그렇다고 믿는 것에서 간극이 생겨 정말 좋아한다고 믿었던 것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상은 허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과 성격, 성향은 참고사항으로 잠시 밀어두고 나 자신을 (보고 싶지 않더라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나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것도.
3. 부러움과 질투는 우월감으로부터
이 부분을 읽을 땐 일단 반발심이 솟았다. 부러움과 질투는 내가 부족할 때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좋아하지 않은 이유를 꼽자면 '잘난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나는 남들보다 잘하는 것 하나 없고, 특출난 개성을 갖는 것도 아니기에 별 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늘 생각했다.
그래서 나보다 (어떤 것이든) 잘 하는 사람이 있으면 열등감을 느꼈다. 그 일이 앞으로 내가 평생하지 않을 일 일지어도 그는 잘났고 나는 못났다는 프레임은 만들어졌다.
나는 못해, 별로야 라는 말을 반복하며 살다보니 무기력해지고 목표도 세우지 않게 되었다. 나는 어차피 더 나아질 것 없는 사람이기에.
하지만 그런 열등감이 내가 못나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월하기에 생긴다니!'
저 정도는 나도 하겠네?(혹은 내가 더 잘하겠다.) 그런데 지금은 할 수 없는 내가 싫다. 대략 이런 메카니즘으로 생각이 흐른다고 한다.
내가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할 수 없기에 열등감이 생긴다는 부분을 보다가 문득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드라마 <또 오해영>의 주인공 해영은 결혼식 전날에 약혼자로부터 '너 밥먹는 모습이 꼴 보기 싫어졌어.'라는 말로 차인다. 여차저차 하여 시간이 흐르고 재회한 둘은 다시 결혼에 관해 이야기하는 기회가 생기는데
해영과의 결혼을 깬 남자는 미안하다며 자신의 사정에 대해 말한다. 결혼식 당일 날 감옥에 끌려갈 상황이었고, 자신을 해영이 기다릴까봐 모진 말을 한 것이었다고.
그 말을 들은 해영은 집으로 돌아와 서럽게 운다. 눈물 콧물 쏟아가며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내가 못나서 차인게 아니래. 태진씨 감옥가서..."
이 장면을 나는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엔 따져보면 그렇지 않은 일들이 너무도 많다. 해영이 자신을 못났다고 여기듯, 내가 나 자신이 별로라고 생각하듯이. 뒤늦게 나도 울고 싶었다.
내가 믿어온 '나'는 어쩌면 주변의 평가와 살아온 시간의 관성일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고, 나를 가두고 자존감을 깎아 먹은 것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과하면 자기애가 아닌 자만이나 자위가 될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 자신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를 아프게 하지 말자. 그리고 똑바로 보자. 그게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