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도 주제도 없기에, 아무 것도 없기에 좋은 이야기
사진 출처 : 알라딘
*임계점을 한 번 넘어보고 싶습니다. 되는 데까지 매일 하루 1 리뷰 도전해봅니다.
*다시 매일 책 한 권 리뷰하기 3일 차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굉장히 많이 들어있습니다! (뒤로 가려면 지금 가야해욧!)
*내용의 대부분은 뇌피셜입니다. 인용은 자제하시고 공유는 많이 해주세영
산문의 트렌드도 바뀌는 모양이다. '저, 죄송한데요'같은 산문집을 서점에서 볼 수 있다니 말이다. 이 책은 에세이 하면 떠올릴만한 7전 8기 도전 끝에 성공을 쟁취하거나, 암을 이겨내는 '극복'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다들 그런 거란다 하며 토닥이는 '힐링'도 아니며, 맨몸으로 산티아고 순례길 같은 곳을 걷고 깨달음을 얻는 '득도'서사도 아니다.
굳이 단어를 갖다 붙이면 '취향'이나 '푸념'정도랄까. 소심한 사십 대 디자이너 아저씨의 단상을 풀어놓은 지극히 평범한 일기 정도 되어 보이는 묘한 책이다. 내가 글쓴이가 될 수 없어서일까(사실 사십 대 프리랜서 남성 디자이너라는 조건을 충족시키기가 더 어렵다.) 전적으로 공감을 하며 읽기도 애매했다.
책에는 죄송할만한 이야기는 들어있지 않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저, 죄송한데요.'라는 제목을 뽑았을까.
죄송하다는 단어는 세 가지 요소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먼저 누가 죄송한 사람인지, 그 죄송한 사람이 누구에게 죄송한 지 그리고 무엇이 죄송한 지가 나와야 한다.
위 문장처럼 주어와 목적어는 생략이 될 수 있고, '무엇'이 죄송하다는 표기 해야 명료하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저, 죄송한데요. 는 '죄송하다'라는 단어를 앞에다가 배치했다. 이럴 경우 우리는 두 가지 상황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먼저, 변명할 여지없이 죄송한 경우다. 어떤 것이 죄송한 지 설명을 하면 사족이 되는 경우에 쓴다. 자신을 낮추어 상대의 아래로 수그리고 들어가는 뉘앙스를 풍긴다.
두 번째는 정중하게 청유를 할 때다. 죄송한데, 00을 해주시겠습니까 와 같이 '불편하게 해서 미안합니다.'라는 뉘앙스가 있다.
때문에 죄송하다는 단어는 필연적으로 듣는 사람에게 불쾌(첫 번째 경우)나 불편(두 번째 경우)을 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든 부정적인 상황에 쓰이는 것이다.
작가가 쓰고 싶던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 내용을 바탕으로 참작하면 두 번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사실 책의 내용에서 '불쾌'를 유발할 만한 에피소드가 없었고 이에 작가가 죄송할 건덕지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작가는 왜 '불편'을 전제로 미리 사과를 하는가. 이는 말하자면
촛 - 또 스미마셍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실례합니다. 죄송한데요. 저기요.라는 말은 주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양해를 구할 때 쓰는 관용어구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위에서 생략할 수도 있다고 언급했던 빈칸이 채워진다.
하고 첫마디를 건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이 먼저 나오면 뒤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따라온다. 작가는 제목을 통해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산문으로 풀어간다.
작가가 '저, 죄송합니다.'라는 제목을 선택한 것은 부끄럽거나 겸손해서 같은 1차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물론 그런 이유일 수도 있다.) 나는 작가가 예상되는 '독자의 반응'을 고려해서 선택한 것을 아닐까 추측해본다.
들어가며에서 잠깐 언급했듯, 책의 에피소드는 평범한 이야기들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2미리 샤프나 미도리 수첩 같은 소품 취향을 밝히거나, 일주일에 몇 끼를 먹느냐는 영양사에 질문에 때론 한 끼 먹을 때도 있고, 세끼 네끼를 먹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퉁쳐서 말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등의 소소한 경험과 단상이 적혀있다.
책의 특징적인 부분은 문체라고 생각한다. 소위 '아무 말 대잔치'라는 말처럼 작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두서없이 쏟아낸다. 일관성 있게 진술을 하는 부분도 각주를 통해 뜬금없는 이야기를 던지기도 한다. 마치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들을 정리하지 않고 쏟아낸 듯 한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타인과 대화를 할 때는 '정리'를 해서 말을 한다. 말을 할 때는 원인과 결과나 시간의 흐름 혹은 공간의 이동 같은 맥락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불필요한 표현이나 과한 묘사는 생략되고, 꼭 필요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달을 한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이 있다고 전제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저, 죄송한데요.'가 엉성하게 보이는 이유는 '독백'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말을 할 때는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게 충분히 정보를 제공하면서 단계적으로 말을 한다. 그러나 독백은 그럴 필요가 없다. 맥락이 없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들을 병렬적으로 쌓아가도 듣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기에 괜찮다. 이미 나에게 설명할 정보를 다 갖고 있기에 생략을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저, 죄송한데요.'는 책이다. 책은 출판되어 서점 혹은 도서관 등에 비치되면서 타인에게 공개된다. 다시 말해, 내가 아닌 사람이 읽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독백처럼 풀어놓는다고 해도 내용을 이해하는 주체는 '독자(타인)'가 된다. 때문에 작가는 자유롭게 글을 쓰면서도 보이지 않는 '독자'를 전제하고 글을 써야 한다. 어떤 것이든 책은 독자에게 '내용'을 전하기 때문이다.
지식을 습득하거나, 감동적인 문장을 찾거나 혹은 인생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이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없기에 이 책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목적'을 갖는 읽기에 익숙하다. 글에는 늘 주제가 있어야 하고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이 있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물론 글에 의도가 있고, 전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해야 글쓴이가 독자에게 명료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목적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즐거움'에 집중한다. 누군가에게 의미와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지기보다는 글을 쓰면서 피식피식 웃었을 것 같은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의미나 메시지가 없으면 뭐 어떤가. 그 자체로 작가의 이야기인데. 자신의 이야기인데 더하고 덜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냥 난 이래~ 하고 편안하게 풀어놓는 진술들 속에서 나는 그저 들을 뿐이다. 아~ 너는 그렇구나. 하고 그냥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좋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