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뱀과 물>을 읽고
* 주관적인 견해가 담긴 글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든 죽어가는 존재를 사랑'하고자 했던 윤동주 시인의 말마따나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에게는 저마다의 끝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 역시 이 규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나면서부터 시작되는 노화를 피할 수는 없다. 늙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된다. 시간은 거꾸로 거슬러가거나 멈출 수 없고 다만 '죽음'을 향해,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갈 뿐이다.
나는 언제 죽을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언젠가 죽는 순간을 잘 맞이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을 왕왕했었다.
패턴은 비슷했다. 나는 '어떻게' 이전에 '얼마나'를 먼저 계산했다. 대한민국 성인 남성 평균 수명이 얼마인지 알아보고 그것에서 내 나이를 빼서 내게 남은 시간부터 추정했다.
그리고는 역순으로 시간을 살펴보았다. 이를테면 "일흔 살 즈음엔 00을 하고 싶어." 그 나이에 00을 하려면 마흔까지는 이런 것을 해놓아야겠지. 하는 식이었다. 물론 1년이나 월 단위로 빽빽하게 짜 본 적은 없다. 5년에서 10년정도 큰 단위로 얼추 계획을 짜더라도 항상 결론은 '오늘의 내가 좀 더 빡세게(?) 살아야만 한다'고 나왔고, 항상 내일부터는 열심히 살겠노라 다짐했다. 다음날의 나는 어제와 다를 바 없었고 공들여 만든 50년 대계획을 쉽게 포기하고 이내 폐기하기를 반복했다.
수십 번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계획을 세웠다가 엎는 일을 반복했지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나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위의 방법을 고수했다. 노년기의 편한 미래를 기본값으로 두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데드라인. 말 그대로 죽는 시간에서 출발하여 '어떻게'를 만들어가는 방법은 내 딴엔 퍽 합리적이었다. 생의 남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고, 목적 의식이 없을 때보다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내가 평균 수명만큼의 수명을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 다른 하나는 내가 그리는 계획은 온전히 나의 시선만 담겨있었다는 점이다.
배수아 소설가의 단편집 『뱀과 물』을 읽고 나의 인생이 바뀌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하지만 여태껏 내가 생각해왔던 방식에 의심을 갖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힌트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믿기지 않긴 하지만 그들은 말 위에서 태어나. 말 위에서 활을 쏘고, 말 위에서 밥을 먹고, 그리고 죽을 때도 말 위에서 그냥 죽지. 주인이 죽으면 말은 그를 실은 채 그대로 흉노의 무덤에 함께 묻힌단다.(p126 「노인 울라에서」 中)
이 책에서 처음으로 나의 방법에 의심을 던지게 한 장면은, 바로 '흉노 말'의 사정이었다. 「노인 울라에서」의 화자 '나'에게 누군가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 툭 던지는 이 장면에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말이라면?'
흉노의 사람들은 말을 잘 타는데 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말에서 살기 때문이다. 라는 정보를 주는 이 문장을 말의 입장에서 뒤집어보면, 말은 태어난 순간 다른 종의 동물의 지배를 받는다. 자유도 없이 일생을 통제당하다가 혹 통치하는 이가 먼저 죽는다면 명이 남아있더라도 죽음을 맞이해야만 한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흉노는 말뿐만 아니라 소녀들의 인생도 통제한다. '여왕을 위해 소녀들의 눈에 아네모네즙을 뿌려 눈을 멀게 하고, 눈먼 소녀들에게 젖을 짜는 일을 시키고, 그것을 성스럽다고 생각(p132)'하게 하며, 눈먼 소녀 노예들은 '코와 이마를 베이고 수령의 무덤에 순장(p136)'된다고 눈 아이는 말한다.
말과 흉노 소녀 노예들의 생은 철저하게 계획되어있다. 그들은 목적에 따라 행동하고 종국에는 순장으로 삶의 쓸모를 완수한다. 그들에게는 종의 평균 수명이 적용되지 않는다. 외려 중요한 척도는 주인의 수명이다. 때문에 그들이 그릴 수 있는 미래는 주인이 살아있는 순간까지다. 그래서 말과 소녀들은 주인도 자신도 둘 다 살아있는 오늘에 집중해야만 한다.
하지만 눈 아이는 주인의 수명이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벗어나는 결단을 내린다. 바로 여왕이 가는 목초지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 북쪽 노인 울라에 도달한 것이다. 눈이 멀었기에 그녀에게는 방향만 존재한다. 어느 날스윽 사라져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p134)처럼 '어디론가' 간다. 눈 아이는 다만 들으면서 자신이 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목격할 수 없기에 정보를 쌓아가면서 이름도 목소리도 모르는 아버지가 자신을 알아보기를 기다리며(p134) 전진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눈 아이는 시간에 개의치 않고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를 찾을 때까지 그녀는 여왕의 반대 방향으로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아버지를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계속 나아갈 것이다. 여왕이라는 주인을 벗어난 순간부터 계획은 의미가 없어지고 반복해야 할 일상이 사라졌다. 예상 수명을 설정하고 스스로 한계를 그어 통제'받는' 삶을 계획하던 나와는 다른 발상이었다. 어쩌면 나는 내 인생을 통제하고 길을 알려줄 여왕의 지배를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간과 관련된 단어를 떠올려보았다. 이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낮과 밤이, 일과 월과 년이 생각났다. 거칠게 분류하면 계절과 하루, 1년으로 정리할 수 있는 이 단어들은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다. 바로 반복이다.
「노인 울라에서」의 흉노 소녀 눈 아이는 시간을 분절하지 않는다. 본디 끊김이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개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인위적으로 패턴을 찾아내고, 반복되는 생활을 만들어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녀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스윽 여행을 할 뿐이다.
시간의 방향은 종착지인 죽음을 향해서만 흐른다고 위에서 말했었다. 하지만 나는 죽음의 감각을 일상에서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항시 맹수의 습격을 걱정하던 수렵생활을 하는 이들처럼 직접적으로 생존에 대해 걱정을 하지는 않는다. 나에게 죽음은 죽음 그 자체이기보다는 은유에 가깝다. 나는 그 이유가 반복되는 일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출근을 하고, 18시까지 일을 하고, 23시에는 잠을 자는 일정한 패턴의 내가 보내는 평일은 월, 화, 수, 목, 금이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비슷한 일정을 소화한 날들이더라도 완전히 똑같은 하루를 경험할 수는 없다. 다만 자주 경험하면서 차이를 인지하는 감각이 무뎌질 뿐이다. 반복은 숙달을 가져오고, 숙달은 이미 경험한 유사한 상황에서 대처능력을 키운다. 더 편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찾게 되고 일상은 경험을 통해 어제보다는 조금 안전하게 자신을 위치하는 법을 터득해 갈 수 있다.
루틴은 삶의 안정감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공허했다. 외롭고, 심심하고 때때로는 우울했다. 어떤 날은 내가 만들어놓은 루틴이 숨이 쉬어지지 않을만큼 목을 죄는 것 같아 잠들 수 없었다. 반복되는 일상이 나를 위험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를 안전하게 만든다. 그런데 죽음의 감각이 무뎌질수록 이상하게도 고통스러웠다.(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남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갑갑함이 몰아칠 때는 도망치듯 국내여행을 떠나곤 했다. 금요일에 일을 마치고 퇴근길에 터미널로 가서 가장 빨리 오는 버스를 타고 일단 떠났다. 버스 안에서 휴대폰으로 도착지를 검색을 하며 조악하게나마 계획을 세웠기에 무계획 여행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짧은 무박 2일의 여행들은 그나마 숨통을 틔어주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사건이 필요했던 것 같다.
소설집 『뱀과 물』의 인물들은 여행을 한다.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의 '나'는 아버지를 찾으러 '스키타이족의 무덤'으로, 「얼이에 대해서」의 얼이 역시 아버지의 왕권 회복을 위해(?) '북쪽의 반두'로 떠난다. 「1979」의 리우진은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먼 곳의 아버지를 만나러 무단결석을 하고, 「노인 울라에서」의 눈 아이도 아버지를 찾아 여왕의 반대편으로 무작정 걸어갔다.
물론 인물들이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만 떠나지는 않는다. 「도둑 자매」의 나는 자신의 언니라고 말하는 이를 따라 선뜻 떠나고 그곳에서 지프를 얻어 타고 바다로 떠나기도 한다.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의 할머니는 '나'를 두고 (아마도 그렇게 추정되는) 반두의 고원으로 떠났고, '나' 역시 여행자다.
여기에 「뱀과 물」의 화자 또한 여행을 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더라도 영국에 위치하면서 과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통해 과거에 살던 곳에서 먼 곳으로 떠나왔다는 것을 참작할 수 있다.
그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자신이 원래 있던 곳을 미련 없이 떠났다. 그리워하거나 돌아가려 하지도 않는다. 위험을 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계로 전진한다. 그것도 기차, 버스, 트럭, 지프, 비행기 등 운송수단을 통해 쉬이 출발지로 돌아오기 어려운 먼 곳으로 떠난다.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의 여행자 '나'와 '할머니'를 제외하면 떠나는 주체가 전부 소녀(남장을 한 여자 아이 포함)라는 점도 특징적이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기 쉬운 약자들이다. 그들은 왜 떠나야만 했을까. 떠나는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애석하게도 즉흥 여행을 떠나면서도 러프하게 계획을 짜는 나는 그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야기들을 끝까지 읽고 접점을 찾아보았다. 여행자들은 공통적으로 죽음에 관하여 생각할 수 있었다.
책에서 죽음은 다양하게 등장한다.
무덤이나 교수대 같은 장소로, 타인에게서 듣게 된 풍문이나 전설로, 유골을 통해서, 병명을 통해서, 죽은 이를 직접 목도하면서 인물들은 죽음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죽음'으로 말미암아 슬픔을 느끼거나 두려워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여행의 매 순간 죽음의 위험을 경험하기 때문이거나 부모가 죽거나 사라진 경험을 통해 이성적인 대처를 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여행에서 소녀들은 죽음을 맞닥뜨리고 죽음의 감각 속에서 살아간다. 매 순간 긴장을 하고 살아가는 그들의 시간은 언제나 시간의 끝(죽음)에 닿아있다. 일상을 떠나 먼 곳으로 떠나는 일은 한편으로는 낭만적인 이미지를 소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면에는 여행자가 '죽음의 위험'을 감각하면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사건을 경험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1과 2에서는 시간의 방향과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정리하면 인간은 언제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이고, 시간을 일/월/년, 낮/밤 등으로 쪼개 패턴을 찾아 반복적인 일상을 만들어내며, 일상에서 벗어나는 여행을 통해 죽음에 가까워지는 경험을 하고 이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노인 올리에서」의 흉노 소녀 노예 '눈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내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허상이고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불어 여행을 떠나는 소녀들에게 닿지 못하면서 '나는 내가 갖고 있는 데이터, 경험만으로 세상을 보려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데이터와 경험은 '인간은 시간의 방향에 순응해야 한다.'라는 전제로부터 나온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요즘 유행하던 '8가지 성격검사'에서 [보수적]이라는 성향이 나온 이유를 알 것만 같다(웃음). 상상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에게 닿기보다는 내가 알고 있는 비슷한 것으로 치환하려는 태도는 바꾸고 싶은 나의 특징이다. 맥락은 잘 만들어갈 수 있지만 생각의 방향은 철저하게 인과관계에 머물러있어 스스로 그어 놓은 한계선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표제작 「뱀과 물」의 초반에 나오는 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이미 일어났다고 알려진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보다 신비롭다. 그것은 동시에 두 세계를 살기 때문이다.(p191 「뱀과 물」)
나의 사고 패턴으로는 '이미 일어났다고 알려진 일'을 생각하는 일은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져 온 맥락인 나의 한 부분을 복원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단박에 깨우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내가 과거의 일을 떠올리든 미래의 일을 상상하든 지금 당장은 없는 세계를 구축하는 일은 둘 다 똑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경험했다고 믿었던 과거도 사실 온전한 기억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생각'을 정리해서 내놓는 결과물이기에, 일어나지 않은 일을 그리는 것보다 근거나 단서가 많을 뿐 큰 틀에서 상상력이 개입하는 것은 같다.
때문에 일어난 일이든, 일어나지 않은 일이든 결국 생각을 하는 지금의 나의 상상력에 좌우된다. 생각의 방향에는 종착역이 없다. 어디로든 갈 수 있고 한계도 없다. 역량이 닿는 곳까지 갈 수 있다. 상상을 시간 순서대로 배열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소설집 『뱀과 물』은 쉽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어려웠다. 작품들을 읽는 내내 나는 내가 해왔던 방식대로 나의 세계와 이야기를 연결하려 했고 반복해서 어긋났다. 부끄럽지만 이해를 포기하고 활자를 읽어갈 때서야 비로소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상함'이 다가왔고 전에 모르던 새로운 느낌(?)을 얻어갈 수 있었다. 고민하며 읽으면 레벨업(?)을 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 속 숨은 TMI를 파헤치자
배수아 작가는 소설가이자 번역가이다.(발저의 『산책자』도 번역하셨음!)
책에 수록된 단편「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는 프란츠 카프카의 『꿈』이라는 책에 옮긴이의 말을 대신하여 쓴 글이라는...!(멋쪄..)
느슨한 빌리지 에디터들이 진심으로 고른 다양한 책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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