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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연 Sep 19. 2018

[소설 추천] 망가진 세상에서도 사랑을,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 민음사

13,000원


추천 키워드

#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로맨스 #동성애

#젊은여성작가

#먹먹해지는

#밑줄가득

#표지갑


Review

<누군가를 밀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디스토피아, 그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들>


원인도 정체도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창궐해 문명이 무너진 세상,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다. 도리 또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이다. 도리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동생 미소의 손을 잡고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다.


그렇게 러시아까지 걸어 온 도리는 친척들과 함께 탑차를 타고 떠돌던 지나와 만난다. 도리는 칼로 지나를 경계하고 위협하지만 지나는 도리와 미소에게 자신(들)과 함께 다니자며 손을 내민다. 그리고 묻는다. "내가 너를 뭐라고 부르면 돼?" 소설이 시작된다.


아니다. 소설은 이미 시작되었었다. 지나가 자기 혼자 살기도 버거운데도 부모에게 학대받는 건지를 숨겨주고 거두었을 때부터. 또는 도리가 홀로 남겨진 미소를 자기 동생처럼 꼭 붙들고 다닐 때부터. 어린아이는 표적이 되기 쉬운데도 불구하고.


<해가 지는 곳으로>에는 다양한 인물이 나온다. 도리와 미소, 지나와 그 가족들, 건지 말고도 류와 단 부부가 등장한다. 미소가 장애인, 건지가 학대 피해 아동, 도리가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한편, 류와 단은 평범한 한국의 부부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평범한 한국의 부부가 사는 세상이야말로 디스토피아와 닮았음을 깨닫는다.


가족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지만 가족과 함께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일을 하지 않으면 금방 가난해졌다. 가난하면 아이들은 상처를 받았다. 친구도 사귀기 힘들어했다. 버젓한 브랜드 아파트에 살지 않으면, 다들 다니는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했다. 그 상처를 부모의 사랑만으로 치유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의 눈총과 무시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나는 몰랐다. (67쪽)


몇 년째 그렇게 살다 보니까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삶이었나 싶어요. 아침에 회사 갈 때마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데,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서는 이 정도로 될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고.
 그건 나도 매일 하는 생각이었다. 텅 빈 놀이터 그네에 앉아 '됐다'와 '될까'를 오가는 기분. (69쪽)


제목 <해가 지는 곳으로>는 이들이 향하는 장소이다. 안전한지 위험한지는 알 수 없지만, 딱히 중요하지 않다. 그곳으로 향하는 이유는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희망 때문이 아니다. 생존 때문이다. 어디로든 어떻게든 이동한다. 멈추면 죽음뿐이니까. 류와 단이 그런 마음으로 일했듯이.


이런 세상에서도 굳이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가 지는 곳으로>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를 테면 지나 같은. 지나는 함부로 희망을 품지 않는다. 대신 다른 종류의 희망으로 산다. 지나는 남을 죽이고 인정받음으로써 살아남고자 하는 아빠에게 "이런 식으로 얻는 희망이란 게 어떻게 가능해?(104쪽)"라고 묻는 사람이다. 지나는 아빠 같은 삶이 최선이 아니라 믿는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도리는 그런 지나에게 점점 끌린다.


그런 게 지나의 희망인지도 모른다. 국경을 넘거나 벙커를 찾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희망. 과거를 떠올리며 불행해하는 대신, 좋아지길 기대하며 없는 희망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대신 지금을 잘 살아 보려는 마음가짐.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 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지나를 닮고 싶었다.  (37쪽)


지나에게서 건지로, 도리에게서 미소로 전염되었던 사랑은 지나와 도리 사이에 사랑이 싹트면서 범위가 확장된다. '바깥'의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 상상할 수 있는 사랑이 넓어지는 일.


그러나 도리와 지나의 사랑은 위태롭다. 집안의 반대나 선천적인 병 때문이 아니라 '안' 집단의 생존을 위해서. 지나와 도리는 사랑하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쪽에 이어집니다.)


읽으면 신나고 즐거워지는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읽을수록 처참해지고 먹먹해지고 고구마를 한움큼 삼킨듯 답답하다. 하지만 믿고 싶어진다. 지나와 도리가 사랑하면서 살아남았으리라고. 나 또한 사랑하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이런 소설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사심 담아 덧붙여 영업하면, 소설 대부분 장면에서 성별이 드러나지 않다가 사회정치적으로 의미를 가질 때에만 드러난다. 이를 테면 여성에게는 총기를 허락하지 않는 지나네 친척들 태도를 설명할 때, 지나와 도리가 사랑할 때. 젊은 여성 작가라서 더 잘 보고 말할 수 있는 설정일 것이다. 민음사 젊은 작가 소설 시리즈가 자랑하는 표지 또한 작품과 어우러질 뿐만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세련되다. 단언컨대 읽고나서 후회하지는 않을 소설. 읽고, 묻고, 사랑하자..! 으앙!



* 아래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 줄거리 설명에 이어서) 품는 인원이 많을수록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에서 어떤 사건으로 인해 지나의 친척이 죽자, 지나의 친척들은 바깥 사람이었던 도리에게 화살을 돌린다. 도리는 그들에게 강간당한 후 탈출하며 지나에게 함께 가자며 손을 내민다. 그러나 지나는 도리의 손을 잡지 못한다. 지나는 그 일이 사무친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지고, 살아남았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외로워진다.


모두 나쁘다. 죽지 않고 살아서, 살아남아서, 이곳까지 와서 또 이렇게밖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 모두 나쁘고 나쁘다. 살았으면, 그 무서운 것을 피해 살아 있으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러지 않을 수 있잖아. 어째서 망치는 거야. 하루하루 위태로운 삶을 왜 더 지독하게 만드는 거야. (53쪽)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살아남았는지는 미지수이다. 소설 뒤쪽으로 가면 화자가 지나와 도리에서 건지와 미소로 넘어간다. 마치 세대가 넘어가듯. "언니가 잠에서 깨면 약속할 거야. 사랑한다고 약속할 거야."라고 말하는 미소를 보고 "시간을 건너뛸 수는 없다"며 하루하루를 되새기는 도리(115쪽). 미소는 도리 덕분에 매듭 없는 사랑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어른이 되지 못하는 대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사랑에는 결말이란 게 없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 결말을 원해서 스스로 매듭을 짓더라도 매듭은 매듭일 뿐. 매듭 다음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건지의 사랑에는 매듭이 없다. 내 사랑에도 매듭은 없다.
  
  언니가 아플 때마다 나는 성큼성큼 어른에 가까워졌다.
  중요한 것과 더 중요한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어른이 되지 못했다. (131쪽)



TMI

〈해가 지는 곳으로〉는 물에 젖지 않는 워터프루프북으로 리커버되었다. 표지에 그려진 소설 속 아이템과 인물 일러스트를 알아보는 재미가 쏠쏠. 두 권으로 나뉘어 출간돼 들고 다니기에도 좋다. 워터프루프북 후기는 아래 링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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