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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Sep 10. 2018

물 걱정 없이 읽는 책, 워터프루프북

민음사 워터프루프북과 함께한 순간들


눈물 젖지 않는 책


하필 통영이었다. 나이차가 7살 터울이나 나는 탓에 이러나저러나 여전히 애같이 느껴지던 막내 남동생의 입대가 벌써 내일 모레일 때, 우리 가족은 통영에 있었다. 동생이 입대하는 훈련소도 통영과 가깝다고 했다. 그런데 하필 입대 전 마지막 가족 여행의 여행지가 또 통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동생의 입대가 실감 나지 않았던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저 바다를 보고 싶었고, 예쁜 풍경들로 유명한 곳들을 한적하게 거닐고 싶었다.


그런데 또 웬걸, 여행 내내 재난 문자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남해지역 폭염주의보가 3일 연속 지속된 것이다. 하기야 이번 여름에 워낙 재난 문자가 많이 왔어야지. 시큰둥해하면서 알람을 껐다. 여행 첫날엔 그렇게 다들 의욕이 넘쳤기에 호기롭게 동피랑 마을로 향했다. 그런데 이건 뭐, 거뜬히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더위가 아니었다. 낮엔 도저히 밖을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 이상의 야외 활동은 무리라고 판단해 우린 계획보다 이른 시간에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돌아왔지만 휴가라고 잔뜩 가져온 에너지를 풀긴 풀어야 했다. 안에만 있기는 일분일초가 아쉬운 상황, 할 수 있는 건 펜션에 있던 수영장에 가는 일이었다. 남동생은 내가 수영을 하러 가자니 졸리다며 귀찮다고 하면서도 나갈 채비를 했다. 그래 이제 너에겐 시간이 없다고 동생아. 지금 졸고 있을 때가 아니야 놀아야 해! 잔소리를 해대며 수영장으로 향했다. 나는 워터프루프 북도 함께 챙겼다.

나무로 만든 게 아니라, 돌로 만든 종이. 일명 미네랄 페이퍼로 제작하여 물에 젖어도 상관이 없는 책이라고 했다. 일반 종이책보다 더 매끄럽고 가벼운 느낌의 종이로 무게도 훨씬 가벼워 여행에 챙겨 오기도 부담이 없었다. 여행에 가져가는 책은 보통 많이 읽지 못할 확률이 높으므로 지나치게 무거우면 짐만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워터프루프북은 가벼운 소재인 데다 두 권으로 나눠져서 부담 없는 무게가 일단 마음에 들었다.


이게 진짜 물에 안 젖는다고? 동생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응 그렇대. 한번 해봐 네가. 처음엔 조심스럽게 물방울을 묻혀 보았는데 쉽게 닦였다. 우와 신기해! 이번엔 더 대담하게 물에 풍덩 빠뜨려 보았다. 정말 잉크의 번짐도 하나 없고 종이가 찢어지지도 않았다. 다만 너무 신나 버린 나머지 수영장 물에 풍덩 빠뜨리니 아무래도 쭈글쭈글해지긴 했다. 그래도 끝까지 물에 폭삭 젖어 버리지 않는 종이가 신기하다고 감탄하면서 동생과 한참을 물에 동동 떠 있었다. 유난히 일몰도 예쁘던 저녁이었다.


다시 방에 돌아와 책을 말리니 점점 원상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런 책이라면 땀이나 눈물이 묻지 않는다는 점도 장점이 될 테다. 아마 슬픈 이야기를 읽다 눈물이 똑 떨어져도 감쪽같이 돌아올 테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종이가 부드럽게 마르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나는 젖지 않는 책처럼 동생도 군대에서 고되고 외로울 시간에 잠시 젖을 테지만, 다시 바짝 뽀송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여름 휴가지였던 통영에서 지금은 고된 훈련을 하고 있을 동생. 훈련기간이 끝나고 자대 배치를 받으면, 동생에게도 워터프루프북을 보내주고 싶다. 아마 군대에서도 여러모로 편리한 물건일 것이다. 그땐 이럴 줄 몰랐는데 그냥 요샌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자주 떠오르고 동생이 참 보고 싶다는 편지도 써 줘야지. 읽다 울어도 괜찮다는 농담 같은 위로도 덧붙여야겠다.


Editor. 다희



마음이 젖는 시간


책을 읽기에 가장 완벽한 시간은 언제일까. 쉬는 날 한적한 카페? 자기 전 침대맡? 책냄새 꼬수운 도서관? 모두 좋지만, 나는 고된 하루를 보낸 저녁 욕조 안을 떠올린다.


사실 반신욕을 좋아하지 않았다. 수증기에 둘러싸인 상태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 어릴 적 말고는 목욕탕도 가지 않을 정도라서 그 흔한 찜질방 데이트도 해보지 않았다. (요즘 찜질방엔 노래방과 만화방도 있다면서요?) 그런데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니 어느 순간부터 주기적으로 '오늘은 반신욕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은 때가 찾아왔다. 딱히 몸을 많이 움직이지도 않았건만 몸이 경고를 보내올 때. 으슬으슬 뻑적지근한 느낌. 그럴 때 반신욕을 하면 근육이 풀어지고 피가 돌면서 머리 말릴 때부터 잠이 솔솔 와 기분 좋은 채로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반신욕에도 딱 하나 부족한 것이 있었다. 몸과 함께 마음도 풀어줄 무언가. 음악을 듣자니 젖은 손으로 플레이리스트와 볼륨을 조작하기 어려웠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자니 기계를 빠뜨릴까 두려웠다. 처음엔 그래서 책을 읽었다. 빠뜨리면 속상하지만 곤란하진 않으니까. 그런데 읽다보니 반신욕이야말로 독서에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임을 깨달았다. 나만 있는 조용하고 편안한 공간. 스마트폰을 곁에 두지 못하는.


그러나 책이 젖을까봐 팔을 쭉 빼고 읽다보면 어깨가 아파왔다. 그래서 젖지 않는 워터프루프북이 나온다고 했을 때 두 팔 벌려 환영한 것이다. 어떻게 책이 안 젖을 수 있지? 설레는 마음으로 택배를 뜯었다. 정작 책을 투명 파우치에서 꺼낸 건 여행지 호텔에서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워터프루프 책도 젖는다. 다만 젖어도 해지지 않아 젖는 걱정 없이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여러 모로 고된 여행이었다. 엄마와 종일 붙어있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고, 오래 걸은 탓에 반신욕이 절실했다. 하나의 장편소설을 나눈 두 권 중에서 1권을 들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몸이 사르르 풀렸다. 전처럼 팔을 빼지 않아도 되어 턱 밑까지 물에 담근 편한 자세로 한 장 한 장 넘겨 읽었다. 바이러스가 창궐한 디스토피아에서 살 곳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나왔다. 해가 지는 곳이 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기가 답도 아니라서, 가만히 있으면 죽는 수밖에 없어서 끝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누군가를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와중에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 믿어야만 살고 싶어지니까. 어째서 디스토피아가 지금 세상과 이리 닮은 거야. 마음이 일렁였다.


1권을 다 읽고 욕조에서 나와 물기를 닦았다. 머리가 마르는 동안 남은 2권을 읽었다. 근육이 풀어지고 피가 돌고 마음도 풀어지고 말았다. 제 나름들의 사랑을 곱씹으며 잠들었다. 이런 세상일지라도, 사랑을. 일어나니 책은 말라 있었고, 마음은 여전히 말랑말랑, 젖은 채였다.


Editor. 연연



소개된 물건 :

워터프루프북 시리즈 / 민음사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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