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선으로 그려본 적이 있다. 좋을 수록 위로, 나쁠 수록 아래로 표현한다면 내 삶은 어떻게 그려질까 하는 생각이었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음을 상징하는 기준선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선을 그었다. 바이오리듬같은 물결이 그려졌다. 그리고 기준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대부분 마이나스 영역에 그려진 내 인생을 볼 수 있었다.
비단 나에게 박한 평가를 했을지언정 그 그림에는 길이 있었다. 그것이 좋았었는지 좋지않았든지 관계없이 시간만은 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꽤 오랜시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스물하나 이후로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채 살아온 것 같다. 초중고 12년과 재수 1년까지는 내 인생의 방향은 확실해 보였다.
대학 먼저 가고, 다음에 생각하자.
어찌어찌 운좋게 대학을 갔지만 생각할 수 있는 '다음'은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길이 정해져 있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갖고 태어난 출신성분과 부모의 재력 혹은 빚, 성장하며 갖게된 사람들은 원하든 원치않든 한 사람이 짊어지고 갈 몫인 것이다. 한 때는 부정하고 괴로웠지만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이 또한 내가 짊어진 십자가일 진저. 받아들이고 가능한 것부터 조금씩 바꿔나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나의 길이라고 요즘은 생각을 바꿨다. 하지만 돈도 실력이라는 말이 대표하는 갑의 특권의식에 화가 치미는 건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다음이 정해진 이들은 그들의 시간과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 다음은 없었고 시간은 흘러가지만 통제할 수는 없었다. 기반이 없기에 나의 자산은 시간뿐이라는 생각으로 그때그때 상황을 메웠다. 보수공사는 지엽적인 부분밖에 볼 수 없는 법이다. 나의 시야는 하루, 길게는 한 달에 머물렀고, 욕심은 부리지 않는게 정신건강에 좋다고 체념했다.
시간의 기록들이 쌓여 한 사람의 얼굴에 드러난다고들 한다. 그리고 과거의 그 기록들이 지금의 나를 결정한다고도 한다. 나는 운 좋게도 인복이 있었다. 삶의 단계 단계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능력에 비해 쉽게 한 계단 오른 것 같다. 사회적 안전망이 거의 없다시피한 상황에서 나를 도와준 수많은 이들이 있기에 내가 있다. 이에 감사하며 나는 다시 나의 지금을 본다.
이젠 길을 잃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길을 잃었다는 말은 정해둔 도착지가 있다는 말이다. 애초에 나의 도착지는 없었고, 남들이 가는 길만 있었을 뿐이다. 내가 원하는 방향, 내가 가고자했던 곳은 사실 추상적인 이야기였고 어쩌면 세상에 없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길 없는 사람은 길을 내며 걸어가야한다. 걷다가 작가 로베르트 발저처럼 급사하더라도 그 길을 가야만 한다. 시간만이 제방향으로 흐른다. 나는 왜 길에 서있느냐면 '내가 가는 길'이기에라고 밖에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여전히 넓은 시야도 없고 청사진도 그릴 수 없지만 묵묵히 걸어가야지. 나 스스로 나의 길이 자랑스럽게 느껴질때까지 길을 내야지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