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쓰기 5일차
어제의 현타가 계속 이어진다. 추악한 나의 본모습을 들킨 것 같아 속상하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닌데 특별해지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좌절하고,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야되는 것도 슬프고 막 복합적으로 씁쓸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도 직시를 해야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추스르고 다시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레퍼런스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레퍼런스가 없어야 나다운 것이 되고, 그렇게 오리지널이 되어 영향력을 펼칠 때만 정말 멋진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림을 그려도 학원가서 배우는 것은 오리지널이 아니기에 못그려도 나의 길을 가야한다고 생각했고, 글을 쓰는 것도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믿었다. 사실 이 믿음이 깨진 건 아이패드를 사고 부터였던 것 같다.
도구는 위대하다. 내가 몇 배의 시간을 투여해 저퀄리티 오리지널을 만들어갈 때, 아이패드 + 펜슬은 더 멋진 결과물을 더 쉽게 뚝딱 내어버렸다. 빚을 내지 않고 자취 보증금을 만드느라 건강버리고, 시간버리고, 자격지심까지 만땅이었던 그 즈음에 (여러 이유로) 멘탈이 털려 충동구매했던 아이패드. 물론 구매까지는 두달의 고민과 감가상각에 대한 의심 단계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후회가 없던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 기점으로 내가 믿어왔던 많은 것들이 무너졌던 것도 맞는 것 같다.
장비빨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 비록 타인에 비해 장비가 부족해도, 부족한 장비로 어느 정도까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면, 내가 좋은 장비를 잡았을 때 그들보다 수월하게 치고 나갈 수 있다는 가난에 젖은 믿음이 있었다. 그땐 그게 나를 지키는 나름대로의 자존심이었고, 베베 꼬인 나의 인성을 지켜내며 겉으로는 웃을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대학 다닐 때 노트북 살 돈이 없어서 손 필기로 노트 한 학기에 4~5권씩 써가며 공부한다거나, 스마트폰이 아직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피쳐폰으로 버티던 시절들. 그게 멋이고 곤조고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나의 사용 범위를 좁히는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맘만 먹으면 알바비를 털어서 해봤을 수도 있었을텐데 지금에서야 조금은 후회가 되기도 한다.
장비를 착용한 나는 내가 그렸던 망상만큼 앞으로 튀어나가지는 못했다. 아날로그랑 디지털의 사용 패턴은 전혀전혀 다른 것이었고, 내가 고집을 부리는 동안 세상은 다른 방식으로 발전해서 기술에 먼저 적응한 사람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앞서나가고 있었다. 나는 구태여 그러지 않아도 되었는데 출발선 뒤에서서 되도 않는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마치 집 마다 하나씩은 있던 전화 번호부가 휴대폰 주소록 단축키로 대체되고, 이제는 언제든 검색하게 되어 필요가 없어진 것처럼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나를 지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신 문물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내가 수년간 지켜온 신념은 잘못된 것이구나. 이래선 안되는 구나. 어제 친구들이 코멘트해준 이야기 중에 기억에 남는 게 몇 개 있었다. 이를테면 학곰은 어디서 남이 하는 것중에 좋아보이는 걸 따라하고, 당위로 삼아서 해야되는 거로 생각하는 것 같아. 라거나 생산적인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게 좋을 거 같아라거나 남의 말을 너무 많이 들을 필요는 없는 거 같아 같은. 그들의 조언은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할말이 없었고, 나에게 화가 났고, 더 슬펐다.
요즘 내가 생산성이 떨어졌다고 느끼는 이유는 대충 알 것 같다. 남들은 이미 하고 있는 것에 뒤늦게 뛰어들어 레퍼런스를 찾으면서 따라잡고 싶은 조급함과 예전에 갖고 있던, 지키고 싶어하던 알량한 자존심. 이를테면 '나는 너희와 달라. 편한 길을 가지 않아. 난 이 외길을 걸어갈 거야.'하는 식의 건강하지 못하고 가난한 마음이 함께 섞이며 '해야되는 데, 빨리 퍼포먼스를 보이고 싶은데' 하는 급한 모습으로 나온 것 같다.
확실히 일도 친구들과 하는 프로젝트도 일상도 잘 풀리지 않는다. 하지만 풀어나가야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며 꽉 막히고, 많이 꼬여있는 나의 가난한 마음을 풀어내고 싶다. 쉽지는 않겠지만 다시 나를 직시하고 고쳐나가고 싶다. 핑계대지 아니하고 나를 작은 우리에 가두지 아니하고 얻을 것은 얻고, 새로 적응할 것은 적응하면서 실패해도 괜찮으니 이것저것 일을 벌이는 내가 되고 싶다. 그렇게 누군가의 레퍼런스가 되고 싶다.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자격지심에 갇혀 추한 모습을 보이는 꼴은 그만 보이고 싶다. 아마 평생 가져갈 이 작은 마음을 건전하게 걷어내는 내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