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과대평가

뭐라도 쓰기 20일차

by 이요마

드디어 집 근처에 11시까지 하는 카페를 찾았다. 걸어서 편도 2킬로 거리라 다닐만도 하다. 우여곡절 끝에 어제 마감을 넘기고 친구들과 고생했다는 말을 하며 일단은 마무리를 지었다.


기분을 낼겸 극장을 가서 <온다>를 봤고, 영화 후반부에서야 상영관에 나 혼자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포/스릴러 영화 내용보다 나 혼자 있다는 게 더 무서운 모먼트였다. 그래도 꿋꿋히 크레딧까지 보고 나왔는데, 역시 끝까지 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읽을 수 없는 한자와 일본어로 가득한 이름들 맨뒤에 크게 쓰인 完(완)과 아래 뭐라뭐라 쓰인 몇줄이 나왔는데, 그 '완'자가 여러 생각을 들게 하더라.


프로젝트의 완료. 분명 갈무리를 했지만 못볼 꼴을 많이 보여 친구들에겐 미안했던 과정이었다. 텐션과 에너지가 전부 바닥에 있어 내 몫까지 다른 사람이 채워야 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덕분에 막판엔 친구들도 과부하가 왔을 게다. 문제는 이 일이 지난 가을의 1호 때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회사일이 말도 못하게 불어나며 인생현타를 쎄게 맞던 시기. 이번은 그 회사를 때려치고 텀 없이 이직해서 딥한 번아웃과 우울증세를 겪는 시기였기에 기력도 의지도 만들어 내기 어렵긴 했다.

이에 더해 판단에 대한 의심까지 돋았다. 새 직장은 처음해보는 직무로 이직했기에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알던, 생각하던 방식으로 일을 풀 수는 없었다. 때문에 내 생각, 취향도 수정해야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의견을 냈다가도 아 역시 제가 틀렸죠? 고칠게요. 오더주세요. 하는 식의 수동적인 태도가 나도 모르게 배였고 내 생각=시정해야할 것이 되어 나중엔 업무가 아닌 프로젝트에도 내 주장과 선택을 말하지 아니하고 남이 정해주길 기다리더라. 그것이 아마도 함께하는 친구들을 힘들게 했을 것이다.


그저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야. 나는 과대평가 되었어. 라는 생각만 반복했다. 친구들과 전 직장동료분들의 도움을 받아 마음을 다잡고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따라갔지만 계속 불안감과 이러다가 짤리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커졌다. 와중에 엄청 헤맸다.

하지만 어찌저찌하여 나는 짤리지도 않고 마무리까지 갔다. 앙금들은 남았겠지만 지나간 것을 붙잡고 계속 찔찔거리기보다 늦었지만 다른 곳에서 점수를 따서 공동체에 기여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그래서 미안하고 고맙다.


한나절을 자다가 오후 늦게 일어나서 카페에 나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지금 내가 쓴 글을 지우고 싶은가? 이것은 내가 온전할 때 쓴 게 아니라고. 나는 이 정도 레벨은 아니라고. 믿고 싶은가?

백프로 동감하진 않지만 1프로라도 그 생각을 안해본 건 아니라 씁쓸했다. 나는 스스로를 미워하는 동시에 과대평가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대단해서 별로인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아. 상반된 것 같은 두 모습은 멀지 않다. 내가 꿈꾸는 나의 모습과 현실의 괴리가 클 때 생기는 것이다. 컨디션이 떨어져 원하는 것만큼 속도가 나지 않을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조급함과 무력감이 가득할 때 나는 이만큼 대단한 일을 했어야 했는데 짜치는 결과물만 내고 있어서 괴로웠던 것이다.


아마도 뒤틀린 자존감이었을 것이며, 소극적이지만 과한 자기애에서 나온 생각이었을 게다. 나는 내 자신을 고평가했기에 스스로를 비난했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이가 없었다. 나는 메타인지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계부까지는 아니라도 월급이 들어온 날 자산배분을 했다. 고정지출, 저금, 생활비, 투자까지 내가 방치해온 자산운용에 대한 주도권을 잡아보려 했다. 내가 생각 없이 쓰는 돈들에 대해 온전히 정리하면서 남에게 의지하거나 의탁하는 것들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입의 파이프라인이 하나뿐이고 통장기록은 명백하기에 돈으로 시작했다. 나의 마음에 대한 통제도 이처럼 조금씩 기록하면서 내가 어느 상황에 처했는지, 어떤 선택과 행동이 나를 위한 처사일는지 생각하며 나의 현재와 단기 목표부터 잡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린 것은 많지만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히 쌓아가야겠다. 인생은 길기에 긴 시간 나를 미워하기보다는 좋아하고 격려하는 시간으로 채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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