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러프

뭐라도 쓰기 35번째

by 이요마

여자친구의 시간을 달려서의 영문 제목은 rough다. 어떤 연유로 그 제목이 채택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입에 붙는 이름이어서 러프. 러프. 하면서 발음해보게 된다. 아마도 일상에서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여서 (이를테면 러프하게 초안 잡아보았습니다.) 그런게 아닌가 하는 생각해본다.


러프하게 가안을 생각해보고 실천으로 옮기는 아주 자연스러운 프로세스가 이따금 나의 인생에는 적용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직장이나 친구들과 하는 프로젝트 때만큼 일단 대충이라도 각을 세워보고 피드백을 받으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해가는 과정이 없이 그저 놓여있다는 느낌이 들때 기분이 이상하다.


20대의 나는 무색무취한게 싫어서, 그렇지만 하이리스크에 대한 감당을 하기는 두렵고 회복할만한 경제적ㆍ정신적 탄력성이 없어서 언제든 포기할 수 있는 작은 취미들을 늘렸었다. 포텐이 빵 터져서 인생역전이라도 되면 좋았겠지만 내가 가진 시간과 에너지의 여력의 시드가 적었기에 올인하지 못하고 늘 한발 걸쳐놓고 간을 보며 행동했다. 그런 작은 시도가 내게 직업을 만들어주긴 했지만, 하지못했기에 괜스레 나는 온전히 투신할 수 있는 열정, 이것 아니면 안된다는 배수진을 보이는 외길인생들을 만나면 괜히 가슴이 떨린다. 내가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30대가 된 나는 여전히 위험회피형의 보수적인 캐릭터이다.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껏 움츠러드렀던 지난 10년이 만든 결과겠지만, 더 늙기 전에 한 번은 다 던지고 도전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번씩 한다. 후회 없는 인생이란 없겠지만 러프하게라도 내가 바라는 삶의 방향과 행보를 그려놓아야 지금보다는 나은(꼭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지만)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알고는 있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고려해야할 문제들과 책임과 채무와 체면과 관계들이 늘어나면서 자꾸 인생이 뒷전으로 밀린다.


지금이 나쁘지 않다. 좋은 편이다. 하지만 계속하기가 버겁고 대안도 마땅치 않아 도망가고만 싶다. 이런 마음으로 계속 살아간다면 대안을 만들 여력도 도망갈 힘도 사라진 채 스르르 죽어가겠지.


내가 두려워하는 건 무엇일까. 경력 단절일까. 간신히 모아온 알량함이 무너지는 것일까. 내가 향유하는 아주 작은 안락함이 깨어지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셋다 맞다. 나는 잃지 않는 싸움을 하고 싶다. 퇴적암처럼 하나씩 쌓이면서 더 단단해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러프하게 나마 매일 쌓아서 누구나 범접할 수 없는 나의 작은 영역을 확보하고 싶다. 참 오랫만에 하고싶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러프하게라도 1년정도 계획을 세워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34. 자극되는 유튜버들, 씨앗을 뿌리는 일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