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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Jul 11. 2022

주간 이요마 인풋노트_7월 2주차

22.7.4~7.10 읽고 본 것들

이번 주는 나의 속도를 체크해보는 시간이었다.

회사 일을 하지 않고 두 달이 되는 시점, 여전히 잠에 드는 일은 쉽지 않지만 내 속도를 체크해가고 있다. 이를테면 내가 한 번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2~3시간이고, 맥스로 땡기면 6~7시간까지도 쓸 수 있다는 것. 트렌드보다는 내 속도에 맞춰서 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행복하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다. 이번 주는 책은 어느 정도 속도를 맞췄지만 영상은 그만큼은 보지 못했다. 부담 갖지 말고 여유롭게 가자.


★모든 리뷰에는 스포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포주의


읽은 책


1. <콘텐츠 만드는 마음>, 서해인, 문예출판사, 2022

뉴스레터 콘텐츠로그를 발행하는 서해인이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마음, 방법에 대해 쓴 에세이. 회사를 그만두고 인풋에만 전념하고 있는 요즘인지라 10일에 한번 뉴스레터를 발행하는 슈퍼 인풋러는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해서 읽었다. 약간의 힌트를 얻은 것 같다.


콘텐츠를 만드는 마음이라면 나는 제1순위가 창작에 대한 열망이라든지, 무언가 보여주겠다는 마음이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했더랬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게 최우선 순위는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앞에 내놓는 콘텐츠는 필연적으로 그 콘텐츠를 소비하는 대상을 생각해야 하고,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재미, 정보 등)을 고민해야 하는 의무가 생긴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콘텐츠를 만들 때 생기는 함정은 아무래도 레퍼런스 체크 없이, 이런걸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겠지? 하는 막연한 추정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속도와 자신이 쌓아온 것들을 보여주는 건 좋지만, 내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에게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나는 자주 잊는다. 더불어, 뉴스레터 같은 정기적으로 제공되는 고퀄리티 지식 노동 집약형 콘텐츠에는 편차가 없어야할 터인데 어느 정도 상향 평준화 시켜놓고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것(최선을 다하되 매번 최고 퍼포먼스를 낼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라는 말도 와닿았다.


속도로 따지면 나는 사회가 돌아가는 것보다 느린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템포로 최고의 퀄을 내려고 120%의 노력을 해야 80%가 나왔다. 늘 마감시한은 짧았던 것 같다. 긴 템포로 일을 한다면 나아질까 하는 고민을 했고, 쉬면서 긴 템포의 일을 준비하고 있긴한데... 뜻대로 되고 있지는 않다.(게으름 이슈)


책을 읽다가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아래와 같다.


�인용

이제부터 뉴스레터를 발행하는 주체들이 정보에 대한 관점을 재정의 하는 계기를 마련해야한다. 뉴스레터가 아니어도 어디서든 정보를 얻을 역량을 가진 사람들 말고, 진짜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 정보를 닿게 할지 고민해야 하는 '의무'가 더해진 것이다. 구독자가 아무리 늘어나도 그들 안에서만 빠르게 정보가 돌고 도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을 방법을 찾아보아야 한다.


-> 나는 누구에게 어떤 정보를 전달하고 싶은가. 왜 이 콘텐츠를 만들고,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 근본적인 질문을 하다보면 내가 사실 별 이유도 없이, 그냥 무언가를 해왔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일하는 것도 그냥 돈벌어야 해서, 친구들과 독립출판물을 만드는 것도 그냥 그 친구들이랑 같이 무언가 하는 게 좋았어서, 인스타에 무언가를 계속 올리는 것도 그냥 기록이 날아가면 아까우니까. 이정도 수준이었지 프로답게 고민하거나 내가 왜 그걸 하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질 못한 것 같다.


콘텐츠는 어쨌든 보아주는 사람들을 위한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들에게 무얼 주고 싶은가. 왜 이걸 만들어서 세상에 공표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할 것 같다.


2. <나만의 콘텐츠 만드는 법>, 황효진, 유유, 2020

<콘텐츠를 만드는 마음>을 읽으니 책장 한 편에 꽂혀 있던 이 책이 생각나 재독. 콘텐츠 기획의 출발부터 실제 적용까지 장르별로 상세하게 소개된 실용서에 가까운 책.


'왜? 이 콘텐츠를 만들까?'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나하면, 없다고 답할 수밖엔 없었다. 대개는 목적이 없거나,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서 혹은 관성적으로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의해서 콘텐츠를 기획도 없이 일단 스타트를 끊곤 했다. 특히 '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벌인 콘텐츠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은 먼곳으로 떠난 친구 A는 늘 내게 '그러다 지치니 적당히 조절하라.'는 코멘트를 주었다. 조급함에서 출발한 강박적인 일벌이기의 말로는 대개 어느날 지치거나 재미가 없어졌거나 하는 자잘한 이유들로 그만두게 되고, 그렇게 완주하지 못하고 그만둔 나를 자책하는 악순환 사이클로 나는 스스로를 몰아넣곤 했다. 애초에 시작점부터 잘못 되었던 것이다.


책에 따르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 때' 콘텐츠 기획이 출발해야 된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뻔하지 않도록 나만의 또렷한 관점을 제시해야 한다. 어떠한 기준도 없이 막연한 리뷰를 하거나, 뱅뱅 돌고 하고 싶은 말을 전달 못하는 책은 독자들이 콘텐츠를 볼 이유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내가 실패한 수많은 프로젝트들은 '하고 싶은 메시지'가 부족하거나, 이해관계를 고려하며 몸사리는 주례사 비평을 한 코멘트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데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생각하는 데서 콘텐츠 기획을 새로 시작해볼 생각이다. 전부터 쓰던 장편 소설이 좌초될 위기에 있었는데, 무엇이 빠져있던 것인지 힌트가 된 책이었다.(이런거 하면 재밌겠는데~는 있었는데 주고 싶은 메시지는 불분명했다.) 자아비판을 멈추고 다시 기획하고 쓰기 시작해야지.


3. <박완서의 말>, 박완서, 마음산책, 2018

1990년대 박완서 선생님의 미발표 인터뷰 몇 개를 그의 장녀 호원숙 선생이 묶었다. 30년 전 인터뷰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세련되고, 요즘 사람들보다도 앞서가는 인터뷰인지라, 질문자의 격이 우스워보이는(그 질문자는 시대에 적합한 사람이었겠지) 인터뷰도 보인다.


소설 수업에 합평작을 내야해서 이번주엔 무조건 써야한다. 그러나 글을 써야한다고 생각하니 턱하니 막혀버려서, 일말의 힌트라도 얻어보려고 전에 사두고 읽지 않았던 박완서 선생님의 인터뷰집을 읽게 되었다. 갈피를 잡으려 펼쳤던 책은 시간순삭... 원큐에 다 읽어버렸다. 아 이게 소설가구나. 싶은 경외심도 들더라.


�인용

"소설이란 상상력에 자기 이야기를 보태는 것 아닙니까."


라는 첫 인터뷰의 한 마디가 내게 큰 용기를 주었다. 어느 순간부터 멋진 걸 쓰고 싶었고, 넷플릭스에 영상화 되는 상업적 성공을 할 만한 걸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더랬는데, 사실 소설이라는게 목적을 두고 쓴다기 보다는, 결국 내 얘기가 아닌가 싶은 순간들이 많았다. 내가 헤맨 까닭은 아무래도 본질을 잊고 있던 게 아닐까 싶더라. 갤럽 강점검사에도 나왔던 '공감'의 능력은 아마 여기에다 쓰라고 있는 게 아닐까...


내 글의 장점을 과거에는 '진솔함'이라고 명명했었다. 이는 사실 '진솔함을 가장한 설득력'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말의 어조가 딱히 없어서 인지, 표정이 일정해서인지 사람들은 내가 이야기를 하면 농담도 진지하게 경청을 하기마련이었고, 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이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소설이라고 썼던 것들은, 내 이야기를 변주하고, 투영해서 쏟아부운 것들이었고 그게 '공감'의 영역에 걸려서 잘 설득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소설은 파고드는 것(지난주 소설 수업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인간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도 박완서 선생님의 말씀처럼 논문이나 학술 서적과는 다르게 소설답게, 책이 사람들을 불러들여야 하는 방식으로 써야하지 않겠는가. 내가 기본적인 걸 잊고 있었구나 싶더라. 내일은 다시 노트북을 들고 쓰러 나가야지.


한편으로, 박완서 선생님의 몇 작품이 '페미니즘'스럽다고 까이는 장면에서는 좀 놀랐다. 와 이게 30년전에도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있네 싶더라. 한 인터뷰에서는 계속 추궁하듯이 남자 까내린거 아닙니까. 기울어진 캐릭터 아닙니까. 물어보는데, 박완서 선생님도 처음에는 그게 현실아닙니까 말하다가 됐다. 니네 알아서 해라. 하는 느낌의 뉘앙스가 느껴져 갑갑모먼트... 하지만 그럼에도 선생님은 할말은 하신다.


�인용

"남에게 존중받고 싶고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것만큼 남에게 대접하는 게 옳고, 남에게 당하기 싫으면 남한테 그러지 않는다든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개념 있잖아요. 평등 개념이라고 할까."


이 대목을 읽으면서는 얼마나 못 알아들으면 이렇게 쉽게 말씀하셨을까 싶었던...ㅋㅋㅋ


마지막은 가장 가슴에 꽂히던 한 문장으로 마무리


4. <힘들어도 사람한테 너무 기대지 마세요>, 정우열, 동양북스, 2022

'나 자신을 알아가기'라는 테마로 책을 찾다가 교보 도서관에서 발견해서 읽게된 책. 정신과전문의 정우열 선생님의 유튜브는 왕왕 보았기 때문에, 마치 그가 말하는 듯이 쓰인 이 책은 금방 읽혔다. 내 마음을 아직도 모르겠지만 힌트는 되었기를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참 쉬워보이면서도 어렵다. 남들 타로는 잘 봐주면서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너무도 몰랐다. 어제 했던 갤럽 강점검사도 마찬가지다. 나는 공감같은 거 못하는 눈새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처럼...


처음에는 내가 기대하는 나의 크기가 커서 그런가 싶었다. 물론 그런 것도 있긴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책을 읽으면서 또 상담을 받고 병원을 다니면서 깨닫게 되는 건, 내가 내 감정에 대해 잘 모를뿐더러, 알아주려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상담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마씨는 행동에 대해서만 진술하지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시네요. 병원의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날 그날 느꼈던 감정을 일기처럼 짧게라도 기록해보세요. 결국 감정이 고여서 마음의 병이 생긴 것일텐데, 나는 왜 내 감정을 못 알아볼까.


책을 읽다보니 눈에 들어오는 키워드가 있었다. 바로 '회피'. 갈등을 회피한다. 인간관계를 회피한다. 실수해서 그르칠 상황이 생길까봐 미리 회피한다. 같은 '시도하지 않음'으로 병이 짙어지는 사례들을 보면서 이거 내 얘긴데? 싶더라. 나는 몹시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선택들을 해왔다. 생각해보면 내 뒤를 받쳐줄 경제적, 정서적 안전망도 없었거니와 가족 안에서 내 역할을 해야한다는 사명감으로 매일을 살아왔다. 이건 아마 다른 가족 구성원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근데 그러다보니 '나'라는 존재가 없었다.


있다가 사라진 것도 아니라. 그냥 없어요. 아니, 그냥 없어요. 라는 상황이 된 거다. 처음부터 없었겠느냐만은 무언가 회복할 원형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다에 가까울 것이다. 심리학 책들을 보다보면 내 안의 어린 나를 만나서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어쩌고 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아직 그 단계까지 가지는 못했다. 그저 상담을 하다보니, 아 그 시기의 나는 외로웠겠구나. 심심하고 슬펐겠구나. 짐작하는 정도다. 다만 지금에야 내가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언제나 결핍을 원동력으로 사는 사람이었고, 나를 채찍질하며 모질게 대해서 성과를 뽑아내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괜찮을줄 알았다. 근데 괜찮은 게 아니었다. 그냥 참은 것이였다. 위기의 순간에 그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 힘도 없는 그 순간에 나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돌아온건 '정신 차려. 너 이럴때야? 너 왜이렇게 못났어. 일어나.' 하는 모진 훈계뿐이었다. 그렇게 살아왔으니 나 자신도 그렇게밖에 말을 못했을 것 같다. 내가 남이나 친구나 어른이나 우리 조카에게나 상냥하게 대하는 것에 비해 나는 나에게 너무 잔인했던 것 같다. 나 자신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스스로 취급했던 것 같다. 그 자기비난은 나를 키웠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죽여갔다.


회피는 달리 생긴게 아닌 것 같다. 나한테 욕먹기 싫어서(말이 이상하다?), 그로인해 내 퍼포먼스가 떨어지고, 남한테 폐끼치기 싫어서 아예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 것. 사실 형성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내가 도망간 것에 가까운 것 같다. 나는 가족에게도, 아니 나 자신에게도 내 속마음을 털어 놓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정우열 선생님은 마지막에 세 가지 조언을 한다. 잘 자고, 잘 먹고, 움직이세요 라고. 그게 맞다. 쉬는 요즘은 자고 싶은 만큼 자고, 전보다 규칙적으로 먹고, 매일 30분 이상은 자전거라도 타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요즘의 감정을 표현하면 충만하다. 불안하다. 그러나 나쁘지 않다. 정도일까.


6개월간 열심히 읽고 쓰면서 나 자신을 찾아갈 것이다. 그 끝에는 내 안의 나를 만나는데 성공해서 꼭 끌어안아주고 싶다. 고생했다고 말이다.



5. <작별인사>, 김영하, 복복서가, 2022

몇달 전에 도서관에 예약을 걸어두었는데, 순번이 길어서 평생 안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잊고 살았더랬다. 생각보다 빨리 순번이 돌아왔고, 잡고 첫날은 반까지, 두번째날은 마저 후루룩 읽었다. 아쉬움과 재미가 공존하던 책.


아마도 호불호가 많이 갈릴 것 같은 이야기였다. 김영하 작가의 전작을 따라오며 읽은 독자들은 과거의 추억을 생각하면서 크게 실망을 했을 것 같고, 미디어를 통해 알게 된 작가의 첫 책으로 잡은 사람들은 이런 상상력이! 하면서 읽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아 작가도 나이를 먹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모난 면이 있고 아웃사이더 기질이 다분하던 전작들을 생각해보면 <작별인사>는 어딘가 사회화된, 유들유들하고 둥글둥글 이야기였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스타일의 변화가 왔구나 싶은 느낌.(마지막 읽은 김영하 작가의 책이 <살인자의 기억법>과 <검은 꽃>이어서 더 그럴 수도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은 인간으로 기능하는가. 인간다움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질문을 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중간에 나온 달마와 선이의 우주정신에 관한 선문답은 이 책의 묘미라면 묘미고 단점이라면 단점인데(루즈한 면에서) 관념적인 부분을 설명으로 풀다보니 이해가 되는 듯하면서도 교조적인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한편으로는 휴머노이드의 결말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세계선안에서 종결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좋았던 부분은 아무래도 장면 전환이 아닐까 싶다. 장의 길이를 고르게 맞추기보다는 필요한 만큼 장을 할당해서 읽히는 속도감만큼은 여전히 최고였으니까. 캐릭터들도 눈에 그려지는 것이 좋았다. 다음 책은 또 다른 스타일을 시도할 것일까. 궁금해지는 모먼트.



본 영화

1. <헤어질 결심>(2022)

<브로커>를 본 김에 수상작 마저보자는 마음으로 사전 정보없이 들어갔다. 배우 캐스팅도 전혀 몰랐는데, 저 사람은 중국어를 왜이렇게 잘해... 생각했는데, 보다가 설마 탕웨인가... 하다가 탕웨이는 한국어를 왜이렇게 잘해? 하더랬다는...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보는 내내 박해일의 감기는 눈과, 탕웨이의 눈빛에 대해 생각했는데, 극장에 나오고 나서도 여운이 계속 남더라.


극중에서 해준(박해일)은 서래(탕웨이)에게 "허리가 긴장하지 않고도 꼿꼿한 걸 보면 살아온 걸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의 연장선상에서 사람의 몸, 특히 얼굴, 그중에서도 눈빛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나는 마찬가지로 영화 안에서 나왔던 워딩인 '품위'가 아닐까 싶다.


도덕적인 부분은 차치하고 영화 안에서의 '인간으로서의 품위'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서래의 대사 중 해준이 DNA 검사를 위해 출두하라고 압박할 때 "죽은 남편 때문에 산 노인을 보지 않을 수는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장면부터 그의 '품위'는 드러난다. 존엄성, 꼿꼿함, 주변에 대한 사랑(이를테면 동물들)까지 이미 갖춘 사람이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따져도 마찬가지. 서래는 엄마를 죽이고 한국으로 건너오는데, 펜타닐을 복용시켜 그에게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할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곁을 떠난다.


최연소 경감 승진을 한 해준에게 품위는 '자부심'이다. 아내 정안(이정현)이 "당신은 살인 사건 없으면 살아있지 않은 것"같다는 뉘앙스의 푸념을 할 정도로 그에게 경찰이라는 역할은 그의 모든 것에 가까웠다. 미제사건의 사진들을 자신의 방 벽에 한 가득 붙여놓을 정도로 워커홀릭이던 그의 생활도 서래로 인해 점차 느슨해진다. 그는 진실을 알게된 후에 스스로 '붕괴'되었다 말하며 서래를 떠난다. 바로 그 장면에서 붕괴되어 품위를 잃은 해준은 이포로 스스로를 격하시킨다.


이포는 아내 정안이 있는 공간(원전 완전 안전)으로 커리어로 치면 좌천에 가깝고, 사랑으로도 포기에 가깝다. 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아가던 그 앞에 나타난 서래와 살인사건은 그를 다시 살아나게 한다. 이때 해준의 눈빛의 변화가 인상적이다. 잠을 못잔다는 이유로 눈을 거의 감고 사는 그가 눈을 부릅뜨고 움직인다. 그 안에 있는 자부심은 망가졌지만, 상대를 대하는 품위는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는 다시 서로를 알아본 서래를 만나러 간다.


서래의 마지막도 자신의 품위를 지키는 선택이라고 본다. '사람이 사람답게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이라는 사전적 정의처럼 둘의 이야기는 고상하고 아프게 느껴진다. (물론 둘 사이는 불륜이긴 하다) 번역투가 주는 어긋남, 대사 하나하나 담겨있는 배려와 사랑,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마음까지 말들이 다 좋았다. 감독의 격은 이런 감정선을 만드는 데서 나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아 나는 <브로커>의 따뜻한 분위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구나(더 나아가 신파를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모먼트. 여운이 길게길게 남아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는 영화였다.


2. <시실리 2km>(2004)

찜꽁해뒀다가 보게 된 한국 코미디. 유튜브에 애드립 명장면하면 꼭 나오는 임창정-우현의 콤비도 기가막힌 영화. 장르로 따지면 코미디+호러+로맨스 정도 될 기묘하게 재밌는 이야기


희화화된 캐릭터가 주는 매력이 있다. 그 중에서도 크레딧에 보면 이름 대신 별칭으로 배역명이 정해지거나 조연임에도 미친 존재감을 보여주는 사람들. 이 영화에서는 임창정, 권오중이라는 주연보다도 수많은 조연들이 다 빛이 난다. 박혁권, 안내상, 우현 셋은 물론이고 김윤석, 변희봉 같은 마을주민들도 하나하나가 다 또렷하게 다가온다. 뚜렷한 캐릭터를 만드는 일은 영화든 이야기든 참 중요하다 생각하는 모먼트


나름 반전이 있는 플롯 가운데 잔잔바리로 쉴새없이 들어오는 잽이 너무도 즐거웠던 영화. 와중에 귀신으로 나오는 임은경과의 기묘한 러브신(?)도 참 웃기고 좋았다. 맘편히 보기엔 좋은 시트콤 같은 영화.




본 시리즈(-ing 포함)

다 본 시리즈

: 이번 주 없음


보는 중인 시리즈

* -ing는 기록만 간단히


1. <왜 오수재인가>(2022)

: 보는 중


2. <시간여행자>(2016)

: 중도하차 심각하게 생각중


이번 주도 열심히 읽고 보자!


구독, 하트, 댓글 언제든 환영



실시간 인풋 기록은 아래 인스타에 하고 있다.

문장 밑줄 치고, 그때 든 감정/생각을 바로 기록하는 중이다.

https://www.instagram.com/hako_ey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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