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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Oct 26. 2023

[세계문학] 끝내 손을 잡아주는 건 사람이었다

이요마 리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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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 쓸고 간 지구에 사는 마음


동해-묵호에 가서 바다를 보고왔다. 어딜 가고 싶다거나, 무얼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충동적으로 KTX와 숙소를 예약한 건 '갑갑한 기분' 때문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글 쓰는 업(소설)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나선 내 삶의 동선이 집-도서관-카페-집으로 팍 줄어들었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비수기여서 그런지 겨울 바다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여행을 가서 내가 한 일이라곤 통창이 있어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글 쓰다가 바다 한 번 보고, 글 쓰다가 바다 한 번 보고 한 게 전부지만 조금은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더라. 내향적인지라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밖으로 도는 것보다 집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동선이 줄어들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나 보다.

코로나19로 비자발적인 격리와 재택근무를 하던 시간들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은 실내에서 마스크를 벗을 정도로 나아졌지만, 그땐 고립. 고립. 또 고립이었다. 어쩌면 1인가구이기에 느꼈던 고립의 강도는 더 심했으리라. 사람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가 좋다는 말을 철회했던 최초의 순간이 아닌가 싶다.

누구도 예상치 못하게 전 지구적인 전염병이 창궐했고, 여전히 진행중인 지구. 이제는 몸과 마음에 내성들이 생겨 점차 무던해지고 있지만 코로나가 남긴 흔적들은 그게 상처이든 생활양식의 변화이든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 있다. 리셋이 아닌, 대응의 방식으로 삶은 계속 되고 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혹 책을 읽으실 분들은 뒤로가기!
★책의 모든 내용을 다루지 않습니다. 일부만 발췌해서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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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읽은 콘텐츠 《둠즈데이북》


《둠즈데이북》은 SF 그랜드마스터 코니 윌리스의 대표작으로,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로 묶이는 장편소설이다. 과거로 시간 여행이 가능해진 2054년 옥스퍼드. 역사학도 키브린은 1320년대 중세 영국으로 떠난다. 사전에 언어, 승마, 문화, 의복, 예절, 예방 접종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났지만 그가 마주한 과거는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다. 기억을 잊어버린 '캐서린'이라는 이름으로 '기욤 드베리'의 영지(장원)에 머물게 된 그는 크리스마스를 위해 파견된 한 사제가 고열로 쓰러지는 걸 보는데, 그 증상이 어째 1348년에나 올 흑사병 같다? 


사실 《둠즈데이북》을 고른 건 나이브한 생각에서였다. 'SF여서 재미있겠지? 전염병 얘기니까 코로나랑 엮으면 되겠다.'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잡았고, 웬걸 이 책은 소설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웠다. 방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풀어내는 디테일한 1300년대 영국과 근미래인 2050년대 영국 묘사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세세했고, 그래서 사건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갑갑함을 더했으니 말이다. 1,2권을 합쳐 90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중에 6할 내지 7할 정도 넘어가면서부터 이야기가 풀리기 시작하니 혹, 이 글을 보고 읽게 된다면 각오는 하고 보는 게 좋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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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영국으로 떠나자 마자 열병에 걸린 역사학자


《둠즈데이북》은 역사학도 키브린이 1300년대 영국으로 시간여행을 하면서 시작한다. 그가 살던 2050년도에 남겨진 사람들과 중세 영국이 교차되며 급박하게 돌아가는 양쪽의 이야기를 그린다. 물론 키브린이 안전하게 과거에 갔다가, 예정된 날짜에 다친 데 없이 잘 돌아왔다면 이야기거리가 안 되었을 게다. 작가는 시작부터 변수들을 심어 놓았다.

과거의 시공간 좌표로 강하를 할 수 있게 돕는 기술자 바드리가, 키브린을 보내고 나서 그의 스승 던위디를 급하게 찾아온다. "무언가 잘못되었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며 횡설수설하던 그의 몸은 불덩이 같았다. 문제는 수수께끼같은 말만 남기고 입원한 바드리 이후로 그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 둘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던위디의 친구이자 의사인 아렌스는 빠르게 판단해 해당 지역과 병원을 격리선언하고 바이러스의 진상을 쫓는다.

문제는, 1300년대로 보내진 키브린에게도 고열 증상이 나타났다는 것. 크리스마스 전후로 보내진 그는 한겨울 숲 속에 도착했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흉악한 살인과 강간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치안이라고는 없던 시절이었기에 눈이 감기는 와중에도 극한 공포감을 느낀다. 비몽사몽 누군가에 의해 구조가 된 그는 다행히 기욤 드베리의 부하 거윈에 의해 영지로 옮겨지게 된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하는 멍한 순간에도 키브린은 가져갔던 중세 녹음기를 '둠즈데이북'이라고 명명하며 착실하게 기록을 해간다.

독자는 여기서부터 혼란에 빠진다. 700년 넘게 시차가 있는 두 장소에서 키브린과 바드린은 같은 증세로 고통받는다. 차원의 문이 열리면서 바이러스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전염되었는가, 혹은 그 반대인가. 두 시대의 사람들은 처음엔 '문제 해결'의 방식으로 환자 치료에 접근한다. 중세에서는 병자 성사를 하고, 머리카락을 태우고, 물수건으로 땀을 닦아 주는 방식으로. 현대에서는 입원을 시켜 약물치료를 하면서 세계인플루엔자센터에 연락해 전염성 바이러스인지 여부를 확인한다. 그러나 시간을 넘나드는 '미지의 바이러스'는 원인도 증세도 규명하지 못한다. 다만 추정할 뿐이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들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해왔고, 그걸 극복함으로서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직까지는 병을 병으로 대하고 '치료'의 영역으로 살핀다. 감정이 크게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키브린은 그 동네에서 처음보는 이방인이었고, 바드리 역시 던위디와 연관이 있을 뿐 가족이나 친지가 영국에 없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 사람'의 바운더리에 들지 않은 사람이기에 거리두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사실 던위디 교수만은 바드리를 챙겼어야 했다. 그는 과거에서 길을 잃은 키브린을 걱정하느라 바드리까지 챙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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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람이 아프기 시작할 때, 감정이 전염될 때


예방접종 덕분이었을까 키브린은 시간이 지나며 회복되었고, 다행히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전염시키지도 않았다. 문제는 2050년대였다. 바드리로 시작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환자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동선을 파악하며 추가적인 감염을 막으려고 아렌스와 병원 관계자들은 최선을 다했다. 최초의 사망자가 나오게 되고, 인플루엔자로 인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되면서 인물들의 분위기는 바뀐다.

미국에서 온 핸드벨 연주자들은 동료를, 아들 윌리엄이 걱정되어 격리 장소로 들어와 버린 개드슨 부인, 아렌스가 걱정하던 손자 콜린까지. '내 사람'이 병과 연관이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물들은 동요하고, 감정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사실 돌이켜보면 코로나19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17호 감염자, 52호 감염자, 00지역 확진자 12명 발생 같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소식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들의 동선을 파악하며 내 바운더리 안에 피해가 가지 않을까 걱정만 했지, 인간적으로 그들을 걱정하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 회사의 동료, 내 친구, 내 가족이 하나씩 양성 판정을 받고 격리를 하면서부터는 마음이 달라졌다. 진심으로 걱정을 했고, 죽음의 공포까지는 아니더라도 아픔에 대해 심히 마음이 쓰였다. 이때부터는 백신 맞았으면, 약 먹고 쉬면서 건강 회복하면 된다는 식의 문제해결의 접근보다는 "괜찮아?"하며 거는 안부와 정서적인 지지, 공감이 더 많이 개입되었던 것 같다. 감정도 전염된다는 걸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둠즈데이북》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주동인물인 던위디와 콜린 그리고 아렌스가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문제 해결'에 포커스를 두고 있어서 그 감정이 덜 전해지다 뿐이지, 병원의 안팎의 상황은 말도 못하게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의학이 발달된 미래의 상황도 이러할 진데, 중세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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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이 찾아온 장원, 그때의 사람들은?


키브린의 중세에도 크리스마스는 찾아왔다. 기욤 드베리 경의 어머니인 이메인 여사가 장원에 기거하는 로슈 신부를 못미더워해서 주교에게 사제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하는 건으로부터 이야기는 급 전개된다. 하필이면 그곳에 온 사제들 중 하나가 몹쓸 병에 걸려서 왔기 때문이다. 바로 흑사병이었다.

키브린은 미래에 있을 때 공부를 했기 때문에 흑사병의 종류와 증상을 알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전염되는지, 치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떻게 대처를 해야할지 말이다. 그저 열병인줄만 알았지만 사제의 겨드랑이 쪽에 검은색 딱딱한 응어리가 잡히는 걸 보고 그는 멘붕에 빠진다. 역사상 1320년대 이곳에는 흑사병이 와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올해 연도가 어떻게 되나요?" 키브린이 물었다.
(...)
"에드워드 3세 치하 21년째 되는 해입니다." 엘로이즈가 말했다.
'에드워드 3세..., 2세가 아니라고?' 너무나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키브린은 에드워드 2세가 몇 년도에 즉위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연도를 말해요." 키브린이 다그쳤다.
"주께서 오신 후로," 사제가 침대에서 말했다. 사제는 퉁퉁 부은 혀로 입술을 적시려 애썼다.
"일천삼백사십팔 년입니다."


1348년. 영국에 흑사병이 도착해 이 마을 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해였다. 시간여행 기술자 바드리가 던위디 교수에게 말했던 "무언가 잘못되었습니다."는 바로 강하 지점의 공간은 오차가 적었지만, 시간은 20여년이나 뒤로 틀어졌던 것. 키브린은 하필이면 대재앙의 시대 한 가운데 소환된 것이었다.

사제로부터 시작된 전염은, 그가 자빠지면서 부닥친 드베리 가의 장녀 로즈먼드에게 옮기는 것으로 시작되어 마을 곳곳에 퍼지게 된다. 괴로움에 환각을 보고, 악다구니를 쓰는 로즈먼드를 간병하면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동요하고, 지쳐간다. 사제를 장원으로 끌어들이면서 사건의 원흉이 된 이메인 부인은 계속해서 현실을 부정한다. 사실 외지인 키브린이 병을 몰고 온거라고, 하녀인 메이즈리가 음탕해서 하늘이 벌을 내린 거라고. 며느리인 엘로이즈가 부정해서 이런 천벌을 받은 거라고. 

차녀이자 아직 5살밖에 되지 않은 아그네스도, 처음에는 놀지 못해서 괴로워하다가 언니를 걱정하기도 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강아지 까망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추모하기도 하면서 무거운 분위기에 적응해간다. 로즈먼드와 아그네스의 어머니 엘로이즈는 외려 '이 상황을 남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할까.'하는 시름에 빠진다. 하녀 메이즈리는 병이 점차 퍼지는 것을 보고 말을 훔쳐 도망가버리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 저마다의 멘붕, 저마다의 감정적인 동요의 출발점은 '로즈먼드'였다. 사제의 아픔은 물론 흑사병의 공포로 이어졌지만 장원 내 구성원 로즈먼드가, 다시 말해 내집단에 속한 인물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회피, 부정, 걱정, 근심, 도망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인물들은 흔들린다. 다만, 이 혼란의 와중에도 중심을 잡고 끝까지 정신줄을 부여 잡은 건 키브린과 로슈신부 뿐이었다.

"이메인 부인이 그런 말을 한 건 병 때문이지 본심이 아니에요. 부인의 영혼이 하느님께 등을 돌린 건 아닙니다." 제가 말했어요. 물론 사실이 아니지요. 그리고 어쩌면 이메인 부인은 죄 사함을 받을 자격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온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병에 걸려야 할 이유도 없어요. 그리고 제가 이메인 부인을 욕하기는 했지만 하느님에 대해 욕을 했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하느님이나 이메인 부인 모두 아무 책임이 없어요. 모든 건 병 때문이죠.
(...)
이건 질병이에요.


위생과 보건이 발달한 미래에서 온 키브린은 반복해서 되뇌인다. "이건 질병이야." 이 말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태를 바라보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일을 막아보겠다는 '문제-해결'의 방식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그 의지는 눈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계속 흔들린다. 짧지만 몇 주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눈앞에서 쓰러져갈 때 키브린은 최선을 다하지만 역부족이다. 멍울을 잘라내 독을 빼내고, 병상에서 밥을 먹이고, 병자의 똥오줌을 치우면서 페스트라는 역병을, 역사의 흐름을 돌리려 하지만 무력감만 계속 따라온다.

로슈 신부는 키브린을 서포트하는 동시에 자신의 길, 성직자의 방식으로 환자들을 간병한다. 병자 의식을 내려주고, 고해를 받으며, 그들에게 신이 당신과 함께 있다는 용기를 전한다. 치료제가 없어 속절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말 한 마디, 믿음 하나는 오늘을 견뎌낼 큰 힘이 되었을 테다. 그 역시도 하느님께 묻고 싶었을 것이다. '왜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시냐고.', '왜 무차별한 천벌을 우리에게 내리셨느냐고.' 말이다. 흔들리는 마음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그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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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 쓸고 간 자리에도, 손을 잡아주는 건 사람이었다.


부인과 자신의 모든 아이들의 묘지를 파던 농부마저도 자신이 판 구덩이에 들어갈 정도로 장원은 황폐화되었다. 마지막 남은 사람은 로즈먼드와 로슈 신부 그리고 키브린뿐이었다. 키브린은 이 곳을 떠나 스코틀랜드로 간다면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얼마가지 않아 무너졌다. 말에 태우려했던 로즈먼드는 숨을 거두었고, 로슈 신부도 고열과 함께 쓰러졌기 때문이다.

교회 바닥에 누운 신부의 몸을 살피던 키브린은 사타구니 쪽에 검게 맺힌 멍울을 발견한다. 이미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병은 진행되어 있었다. 멍울을 칼로 째고, 그를 조금이라도 더 살려보기 위해 노력하려 하지만 시간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로슈 신부는 눈을 감기 전에 키브린에게 이렇게 말한다.

"최후의 날에." 신부가 말했다. 입안 가득 부어오른 혀 때문에 목소리가 또렷하지 않았다.
(...)
"저는 주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저버리신 것은 아닌지 두려웠습니다." 신부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랬지. 키브린은 신부의 입술과 뺨을 조끼 끄트머리로 닦아 주었다. 하느님은 이곳 사람들을 완전히 저버렸어.
"하지만 주님의 크신 은혜가 있었고,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신부는 다시 침을 삼켰다.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성녀를 내려 주셨습니다."
(...)
"하지만 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키브린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왜 울고 계십니까?" 신부가 물었다.
"신부님은 절 구해주셨어요." 흐느낌 때문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전 여러분들을 구해 내지 못했어요."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가 말했다.
"그리고 아무도, 우리 주 그리스도조차 죽음에서 사람들을 구할 수 없습니다."
(...)
"하지만 성녀님은 저를 구원해 주셨지요." 로슈 신부가 말했고 신부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두려움으로부터." 로슈 신부는 콜록거렸다. "불신으로부터 저를 구하셨습니다."
(...)
"저는 이 모든 이 중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로슈 신부는 말하며 두 눈을 감았다.


사실 로슈 신부도 두려웠던 것이다. 생지옥의 순간에서 평정을 갖고 사람들을 구하려 애썼지만, 그도 인간이었기에 너무도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도망가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남아 숭고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건 장원 사람들과 키브린 때문이었을 게다.

죽음의 순간에도 병자의 손을 잡아주고, 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견뎌냈을 것이다. 맞잡은 손의 온기는 로슈 신부를 두려움과 불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줬다. 흑사병이라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지만, 그 안에서 마음과 마음이 연대하며 고통의 순간을 견디게 만든 것이다. 종말에 준하는 순간에도 끝까지 타인에게 손을 내주는 건 사람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생각했다. 불현듯 바다를 보고 싶었던 것은 그저 '갑갑해서'가 아니었구나 하고 말이다. 문제는 '혼자-고립'에 있었다. 나는 극한의 순간에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일까. 누군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을까.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숭고한 선택을 주저않고 할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랜만에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필요한 건 연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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