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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Nov 12. 2023

14. 잃어버린 본질, '매스터피스'를 찾아서

매스터피스 포인트: 임팩트, 어긋남, 독자성

unsplash.com

14. 잃어버린 본질, '매스터피스'를 찾아서


밤에 카페에 나와 박웅현의 <여덟 단어>를 읽다가 꽂히는 단어 하나가 있었다. '본질'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는 무엇인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고, 문득 잊고 있던 단어 하나를 떠올렸다. 바로 '매스터피스'였다.


대학생시절 내가 추구하던 이상은 '매스터피스'였다. 마스터피스(materpiece). 명작. 어떤 단어로 말해도 좋은 그 단어를 나는 꼭 '매'스터피스라고 말했다. 그렇게 부르는 게 '나의 마스터피스'를 이르는 어감의 차이라고 믿었으니까. 돌이켜보면 매스터피스의 객관적인 기준이나 조건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내 마음을 동하게 하면 매스터피스, 내가 쓴 글들은 전부 매스터피스, 앞으로의 내 미래도 매스터피스. 막연한 긍정과 희망으로 가득한 단어였다.


'매스터피스'를 잃어버린 건 언제부터일까. 처음 직장인이 된 2017년? 아니, 입사하고 바로는 아니었다. 퇴근 후 친구들과의 독서모임에서도 난 줄창 '매스터피스'를 부르짖었으니까. 거기에 덧붙여 이상한 신념(?)도 지향했더랬다. '치명, 세련, 임팩트' 세 가지를 쫓겠다고. 회사 신년회의 때 사장님이 직원들의 한 해 목표를 묻는 연례행사 때도 저 세 단어를 전직원 앞에서 말했으니 '매스터피스'에 대한 신념은 확고 했던 것 같다.


어느 시기나 사건을 기점으로 '매스터피스'를 잃어버린 건 아닌 것 같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말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 자리에는 '현실'이나 '주식'이나 '트렌드'나 '마케팅' 같은 단어들이 들어찼다. 요즘에는 '시사', '정치', '게임', '유튜브', 'SNS' 같은 단어들이 끼어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때는 그것만 생각하고, 미친 사람처럼 천착하던 가치가 나 아닌 것들로 지워지고 있었다.


본질에 대해 생각하다가 다시 만난 '매스터피스'라는 단어를 나는 똑바로 응시할 수 없었다. 내 것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 한동안 글쓰기를 놓으며 그 단어를 말하기도 면구스러운 부끄러움,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닌데 말해도 되나 싶은 열등감, 앞으로도 그 단어와는 멀리 살 것 같다는 실망감까지. 한때는 본질이라 여겼던 것을 방치했던 지난 7년이 허무하게 지나갔다.


7년 전의 나는 본질에 맞추어 커리어를 선택했었다. 언젠간 매스터피스를 쓰는 작가가 될 거고, 글을 다루는 사람들이 많은 출판사에서 일하면 퇴근 후에 내 꿈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물론 잘못된 생각이었다. 출판사는 작가 양성소가 아니라, 출판업 전문가가 되는 곳이었으니까. 책과 텍스트와 문학과 가까운 건 부인할 수 없으나, 나는 내 일에 최선을 다했을지언정 매스터피스라는 본질은 놓고 지낸 시간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럼 '매스터피스'를 쓸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레퍼런스'를 먼저 찾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과물을 내는 노레퍼런스주의자였던 과거와는 너무도 달라졌다. 그러나 회한에 젖어 변해버린 나 자신을 자책하고 있기엔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 달라진 건 달라진대로 받아들여서 '내가 바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잃어버린 '매스터피스'를 다시 찾고야 말거라는 마음으로 일단 내가 좋아하는 '매스터피스'들을 떠올렸다.


매스터피스 포인트

지금은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는 무취향의 상태, '좋아하는 것이 마땅히 없어서요.' 모먼트였기에 사실 최근에 '매스터피스'급 감흥을 받은 콘텐츠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왓챠 피디아를 켜서 과거의 내가 찍어두었을 별점 5점짜리 영화와 책을 살펴보았다. 대부분은 별점을 수정해 강등시키며(?) 재평가의 시간을 거쳤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7편을 추려보았다.


[영화]
킬링 디어 / 요르고스 란티모스(2018)
소나티네 / 기타노 다케시(2000)
지구를 지켜라 / 장준환(2003)
[책]
AKIRA / 오토모 가츠히로(1983)
대프니 듀 모리에 단편선 / 대프니 듀 모리에(한국 출판년 2014)
꼬마 악어 타코 / 전이수(2017)
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한국 출판년 2017)


하나하나 마음 속에서 '아! 이건 매스터피스지.'라고 자부하는 작품들이다. 근데 이것들이 왜 매스터피스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20대의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적인 느낌, 다시 말해 추상의 영역에서 머무르는 것을 좋아했다. 30대가 된 나는 조금 달라졌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직관적으로 왜 그런지 정리를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각 작품의 '매스터피스' 포인트를 찾아보았다.


[매스터피스 포인트]

킬링 디어 : 배리 키오건의 이상함, 두건을 쓰고 빙글빙글 돌며 총을 쏘던 장면, 아무일 없었다는 듯한 태연한 식사 장면

소나티네 : 어이! 코노야로 바가야로! 하는 아저씨 스웩 + 미소, 표정이 별로 없는 기타노 다케시가 총을 쏠 때, 종이 스모 장면

지구를 지켜라 : 백윤식의 비주얼과 신하균의 미친 연기, 안드로메다로 가는 상상력, 터무니없음과 잔혹한 현실의 교차

AKIRA : 달을 부셔버리는 상상력, 속도감, 나사가 빠진 것 같은 주인공들

대프니 듀 모리에 : 이상함. 읭? 한 충격, 예상치 못한 결말, 이미지적 충격

꼬마 악어 타코 : 그 나이대 아이만이, 아니 그 나이 전이수만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 때묻지 않음

산책자 : 이 세상과는 단절된 고고함, 삶의 본질에 대해 들여다보는 우화적인 통찰


이렇게 추려보니 7편의 작품들이 몇 개의 키워드로 묶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매스터피스 포인트는 크게 3가지였다.

다음 영화

하나, 복잡한 상황이나 감정선을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임팩트)

: 배리 키오건(좌)과 기타노 다케시(우)는 쳐다본다. 감정을 다 쏟아내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음으로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공백을 채우게 만든다. 이들의 표정은 빨리 감기로 보며 스토리를 체크하는 방식으로는 감상할 수 없다. '순간'에 머무르며 그 이상한 공기 흐름을 느낄 때 나는 각인에 가까운 임팩트를 받았다.

다음영화, 알라딘

둘, 예상을 한참 벗어난 전개(어긋남)

: 독자나 시청자의 입장에서 나는 맥락에 맞는 다음 장면을 상상하면서 콘텐츠를 봤던 것 같다. 이러이러해서 이런 장면이 나오겠지 싶은 타이밍, 혹은 그보다 반박자 빠른 타이밍에 이 세 작품은 뒤통수를 친다. 뜻밖의 전개, 그것도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 2절, 3절, 4절, 뇌절까지 치는 극단까지 상상력을 끌고 간 다음에 보는 사람을 풀어준다. 나는 이 어긋남을 사랑했다.

알라딘

셋, 세상의 규칙과 질서, 그리고 당위 바깥에 위치한 시선들(독자성)

: 전이수가 일곱 살에 쓴 <꼬마 악어 타고>는 악어의 시선에서 자연을 아끼자는 메시지를 그려낸다. <산책자>는 일생을 아웃사이더로 살다가 정신병원에 격리된 발저의 짧은 작품 모음집이다. 둘의 공통점은? 세상의 규칙이나 질서 그리고 당위 바깥에서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다는 것이다. 그 시선은 따뜻하기도 하고 고고하기도 하다.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시선을 나는 사랑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내가 사랑했던 '매스터피스'가 무엇인지 정리가 되었다. 임팩트, 어긋남, 독자성이라는 단어를 다 아우르는 작품. 무엇이 좋을까를 고민하는 시간들 속에서 잃어버렸던 '좋고 싫음'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게 근본이고 본질이지!' 이상하게 확신이 들었다.


매스터피스 포인트를 알았다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기준에 맞는 '매스터피스'들로 내 삶을 채우는 것 아니겠는가. 좋아하는 걸 찾아보고, 그것과 연계된 것들을 파면서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것. 다른 사람이 만든 콘텐츠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내가 직접 써서 메우는 것. 그게 본질이 아니겠는가.


결국 좋아하는 것의 힌트는 내 안에 있는 것이었나. 나는 어디서 무얼 찾으려 했던걸까. 생각을 재고하게 된 밤. 카페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딘가 후련했다. 이 기분이 내일도 계속 되길 바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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