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와 나의 글쓰기
사진출처 : 알라딘
* 매일 하나의 리뷰(혹은 글쓰기) 12일 차
* 본 리뷰에는 주관적인 견해가 담겨있습니다.
1. 들어가며
언젠가 필독서 목록에서 보았을법한, 어느 집이고 책장에 한 권쯤 꽂혀있을 것 같은(그 옆엔 먼나라 이웃나라와 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아리랑 같은 책이 있을지어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이하 빠리-)>를 뒤늦게 읽게 되었다. 20년이 지난 책이지만 글은 술술 읽혔다.
2. 줄거리 요약을 못해요 - 똘레랑스가 부족한 독후감
책을 읽으면서 큰 발견을 했다. 내가 왜 학교 다닐 때 필독서 읽기를 싫어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이다.
나는 글을 읽는 속도가 더뎠다. 거기에 이해력도 떨어지는 편이었다. 책을 읽어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를 못하니 '요약'이 안 되고 그래서 독후감에 '줄거리'칸에 쓸 말도 너무 많았다. 그때마다 내가 취한 방식은 줄거리를 주절주절 쓰다가 분량이 초과되어 참 좋았다로 끝나는 식이었다. 그때의 독서는 주객이 전도되어 '독후감'을 쓰기 위해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매번 줄거리 요약에서 좌절을 하니 도무지 책에 재미를 붙일 수 없었을 게다.(그렇게 믿게 되었다.)
내가 읽은 개정판 빠리-는 친절하게 '보론'에서 똘레랑스가 무엇인지 요약해서 알려준다. 그 부분을 읽으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거참 독후감 쓰기 좋은 부분이네 하고 말이다.
내가 이해한 똘레랑스는 '다름의 인정'이다. 너와 나는 다르고, 서로가 그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정도로 요. 약. 해본다. 내가 학창 시절에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썼다면 줄거리를 왕창 때려 박은 똘레랑스와 다름, 이해, 인정 같은 키워드는 들어갔지만 나의 '요약이 안 되는 상황'은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탄생했을 게다. 현실에서 만약에 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만약에 내가 '가이드라인으로 제시된' 줄거리 요약의 틀에서 벗어나 지금처럼 '내 맘대로' 느낀 점을 풀어냈다면 지금보다 책을 가까이하지는 않았을까?
요약의 괴로움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대학을 모대학의 인문학부에 진학했고 1학년 역사학 입문이라는 교양수업의 첫 과제, 아니 대학생활의 첫 과제를 받고 좌절했다.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A4 2쪽 내외로 요약하고 독후감을 써오라니.
3. 나는 나의 색을 갖고 있는 것일까?
상대평가로 채점을 하는 교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70여 명의 학생을 채점할 '기준'이 필요했을 게다. 그에겐 똘레랑스보다는 학생의 성실도가 우선이었나 보다 하며 이제는 그를 이해하려 한다. 문제는 '요약'이 내 인생에 계속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 장학금 신청서를 쓸 때, 수업에서 과제를 발표할 때, 군대에서 보고를 할 때 (취업을 위한) 대외 활동을 신청할 때,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때 등등 요약은 나의 10대와 20대를 지배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직장을 구하고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브리핑'을 해야 할 테니 어째 차라리 내가 '요약 능력'을 키우는 것이 나아 보인다. 누구도 내가 요약을 못해도 다른 것을 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주지 않는다. 그럴 똘레랑스를 발휘할 세상이 아니었다.
나의 색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말을 잘 들었으며, 지극히 자기주장을 아꼈다. '니체의 인간학'에서 저자 나카지마가 극도로 혐오하는 '대중이란 보호색 속에 몸을 숨기는 인간'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어릴 적 보던 만화에선 주인공들이 늘 모험을 한다. 아니면 모두 안 된다고 하는 것에 도전하여 목표를 성취한다. 그렇게 자신들의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후회도 빠꾸도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지만 나는? 남들 가듯이 남들처럼 남들만큼만 살아온 것 같다. 그렇지만 늘 뒤따라가는 입장이기에 '남들'이라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보다 늦고, 부족하기만 했다. 기준이 남에게 가있으니 늘 나는 미달인 부분을 메웠다. 어느 날 문득(많은 사람들이 어느 날 거울을 보면서 느끼는 그 감정...) 내 인생을 게임 캐릭터처럼 능력치를 그래프로 매긴다면 어떤 모양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결과는 좋게 이야기해서 '만능형' 나쁘게 말하면 특성화된 능력 하나 없이 이도 저도 아닌 '평균형'이었다. 그렇게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늘 단점에 주목해 메우기 바빴는데 장점 같은 것을 찾아볼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끝없는 '요약의 세상'에는 어떠한 곳에 가더라도 '모범답안'은 존재했다. 순진하게 자기 생각을 쓰다가 글자 수 초과로 탈락한 대입 논술부터 각종 레포트들과 지원서들, 그리고 자기소개서까지. 처음엔 남들 하듯이 1등은 못하더라도 적당히 따라갔다. 그러나 안 되는 요약이 갑자기 잘 될 일은 없었고, 나는 어느 순간 요약을 포기했다. 대신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았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진실하게(거짓이든 사실이든) 글을 쓸 수 있었고, 쉽게 읽히는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때부턴 어떤 종류의 글이든 모범답안들에 굴복하지 않고 내 방식대로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조악하지만 '문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이 꽤 좋았다. 지금도 브런치라는 플랫폼에서 매일 맘대로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그나마 이 정도 글을 쓸 상황은 인문학부에서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만들어진 속된 말로 '곤조'가 내가 이십여 년 평생 그나마 건졌다고 자랑스럽게 말할만한 것이 되었다. 조금씩 변하기야 하겠지만 앞으로 나는 나의 글을 쓰고 싶다. 누군가 나의 글을 읽었을 때 어! 이것은 학곰군의 글이네 하는 그런 글을 말이다.(이 말은 소설가 박상 씨의 작가의 말에서 본 말을 인용했습니다.)
규격에 맞지 않아도 이해하는 것, 단점보다는 장점을 특성화시키는 것. 어쩌면 나의 글쓰기도 똘레랑스로부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