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은퇴를 앞둔 리어 왕은 세 딸에게 자신이 다스리던 왕국을 물려주기로 결심한다. 왕은 세 딸을 불러놓고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보라고 한다. 이에 첫째 딸 고너릴은 "모든 한계를 다 넘어 전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둘째 딸 리간은 "언니만큼 사랑한다"고 했다.
반면 셋째 딸 코딜리아는 할 말이 "없다"고 밝혔다. 왜 할 말이 없는지는 상당히 논리적이다. 코딜리아는 “언니들이 아버님만 사랑한다 말할 거면 남편들은 왜 있냐”며 “제가 만일 결혼하면 제 서약을 받아들일 그분은 제 사랑과 걱정과 임무의 절반을 가져갈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전 분명코 언니들처럼 아버님만 사랑하는 결혼은 절대로 않겠다”고 강조했다.
리어는 분노하며 코딜리아와의 혈연관계를 끊고 그를 저주한다. 자신의 왕국을 절반으로 나눠 첫째 딸과 둘째 딸에게만 물려준다.
왕권을 차지한 고너릴과 리간은 리어를 배신한다. 리어는 황야 속을 헤매면서 몸이 아닌 정신이 병들어간다. 코딜리아만이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행동’으로 보여주지만 리어와 세 딸들은 결국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언어는 허구다
딸들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행동이 아닌 언어로 확인하려는 순간 비극의 활시위는 당겨진다. 언어에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각자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인격체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 ‘인간’이라는 똑같은 단어로 불린다.
물론 이름·성별·나이·외모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한 인간을 또 다른 인간과 명확하게 구분해 표현할 수 있다. ‘얼굴이 둥글고 키가 178cm이며 7등신인 28세 남성 김철수’ 같이 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진실로 받아들여진다면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겨우 이름·성별·나이·외모로 결정된다는 괴상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특히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때 언어의 한계는 여실히 드러난다. 모두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각자가 느끼고 표현하고 싶은 사랑과 슬픔의 정도와 종류는 제각각이다.
둘째, 언어는 진실을 담보할 수 없다.
다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 사랑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화자 외에는 결코 알 수 없다. 때론 화자 자신도 그것이 진실인지 모를 수 있다. 집착과 증오를 진실한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 체계를 창시한 레우키포스·데모크리토스는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가장 작은 단위를 ‘Atom’이라고 불렀다. 그리스어 atomos는 ‘더 이상 나누지 못하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후세대 과학자들이 ‘원자’를 처음 발견했을 때 Ato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에는 원자를 더 쪼갤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초 과학자들은 원자가 양성자(proton), 중성자(neutron), 전자(electron)로 쪼개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결국 Atom 이라는 단어는 잘못 활용된 셈인데, 나는 이 사례가 언어는 진실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시라고 생각한다.
진심은 언어가 아닌 행동에서
리어와 세 딸에게 벌어진 비극은 이런 언어의 허구성으로부터 기인한다.
"사랑한다"고 말했던 고너릴과 리간은 사실 리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었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할 게 없다던 코딜리아는 사실 리어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다.
"없다"고 표현된 사랑이 진정 ‘있음’이었고, "있다"고 표현된 사랑은 진정 ‘없음’이었던 것이다.
진실은 언어가 아닌 행동에서 드러난다.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고 프랑스로 쫓겨났던 코딜리아는 아버지를 구하러 다시 왕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언어의 허구가 당긴 비극의 화살은 결국 리어와 세 딸을 꿰뚫고 말았다.
* 문장이 단정적으로 표현돼 있으나 아마추어의 자의적인 해석과 사견입니다. 모순점이나 틀린 점이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