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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조앤 Jul 14. 2021

연필로 쓰기/김훈

문장 바꾸기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눈처럼 쌓이면

내 하루는 다 지나갔다.

밤에는 글을 쓰지 말자.

밤에는 밤을 맞자.


<연필로 쓰기> 김훈 산문의 페이지 11


ElisaRiva@pixabay

내 몸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생각하기는 나의 실핏줄이다.

내 몸을 땀 흘려 쓸 때

나는 내 몸이 먼 인류가 걸어왔던 진화의 시공을 거쳐

살아남은 자, 생존자의 몸임을

알기를 바란다.


내 모습은

내 생각은 외로운 것이 아님을.


나의 수고가

꾸역꾸역

눈처럼 쌓이면

내 하루는 다 지나갔다.

밤에는 내 몸을 쓰지 말자.


밤에는 밤을 맞자.


밤은 내 수고를 까맣게 보이지 않게 덮는다.

비로소 나는 연필을 꺼낸다.

낮은 등 하나를 켠다.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가 아니다.

그러나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처럼

내 삶의 어그러짐과 비뚤어짐을 조각 내 주기를

대장장이의 망치처럼

내 삶의 연약함을 단련시켜주기를

뱃사공의 노처럼

내 삶을 내가 바라는 멀지 않은 곳으로

데려다 주기

바라고 바란다.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먼지처럼 쌓이면

내 하루는 비로소 다 지나갔다.

밤에 나는 몸이 아닌

내 마음까지를 쓴 것이다.

내 생각까지를 쓴 것이다.


밤에는 밤을 맞자.

캄캄한 밤을

가장 어두운 밤을

나는 견딜 수 있다.

새벽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음을 알기에.


그러나

그 새벽이 내 앞에 당도하지 않더라도

그 새벽은,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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