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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쿠나마타타 Jan 06. 2021

수동적인 눈치가 아니라, 능동적인 양보로

주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누구나 남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는다.

사회저인 동물이라고 하는 인간에게 당연한 부분이다.


그런데 살면서 모든 것은 정도와 차이가 있는 법일텐데,

대체 어디까지가 나의 윤택한 삶을 위한 적정한 정도이고

어디까지가 주객이 전도되어 피폐한 삶이 되는 걸까


남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나의 여러 이해관계의 꼬투리가 남의 손에 있다는 것이 아닐까

특히 직장에서 나의 득과 실을 좌지우지 당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 득과 실이라는 것이 커튼 뒤에 숨어 있는 그림자만 무시무시한 괴물이라면 어떨까

몇이나 되는 사람들이 진정 그 득과 실의 실체가 두려워서 남의 눈치를 보고 사는걸까

사실 그 커튼을 젖히면 그저 괴물의 가면을 쓴 쪼그마한 꼬맹이 하나가 칼싸움 놀이를 하고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들은 실체보다는 만들어진 이미지에 의해 많은 삶의 부분을 지배당한다.

메스미디어도 그러하고, 팬덤을 형성한 연예인들도 그러하다.

미디어나 연예인 처럼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당장 내 코 앞에서 매일 같이 일어나는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도,

실체와 그림자, 실체와 이미지를 구분하는 일이란 여간 쉽지가 않다.

습관이 되지 않아서, 하는 방법을 몰라서, 굳이 그걸 다 구분하자니 살기 피곤해서 그저 흘러가는대로..

이유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수동적인 단어들로 표현된다.


남의 눈치를 보는 적당하는 정도는,

이게 눈치를 보는 일인지,

아니면 나의 기준에 맞는 양보와 희생, 또는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인지의 차이는 바로,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의 문제이다.


남의 눈치를 보는 내 모습이

모두 남에 의해 결정되고, 남의 기분과 생각을 살피고, 나의 주장과 의견따위는 전혀 없고 이 모든 일련의 행동을 할 떄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면 나는 커튼 뒤에 꼬맹이에게 커다란 가면을 씌우고 그림자와 싸우고 있을 뿐이다.

반대로 나의 원하는 목표와 얻고자하는 가치가 있고,

조직에 적응하고자하는 마음, 융화되고 싶은 욕구, 타인을 위한 양보나 희생 같은 말들로 치환이 가능하다면

그 단어는 더이상 '눈치'일 필요는 없다.

주변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시산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서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이다.

내가 컨트롤하고 결정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낼 필요는 없다.


특히 나처럼 회사생활을 하는 정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변이 눈치를 과도하게 신경써서 정신과에 다니거나,

이런 눈치보는 삶이 싫어서 승진을 포기하고 개인주의의 길을 걷거나, 

둘 중 어느쪽이든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만큼 중도를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고 서툰 내가 나아갈 길은,

물론 목표와 길의 방향을 세운다고 항상 정방향으로만 나아가진 않겠지만,

적어도 나는 쓰러지고 둘러가고 헤메어 찾아가더라도, 결국 높은 곳에 꼽아놓은 깃발이 저 멀리나마 보이니,

가다보면 만날 것이다.

그러한 나의 나아갈 길은, 수동적인 눈치가 아니라 능동적인 양보로 가는길이다.

사회로부터, 주변으로부터, 조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

상호호흡하고 내가 하지못하는 많은 일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채우고 받아야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나는 항상 지금의 관계나 오늘 하루의 에피소드에 집주앟기보다는,

내가 이 사람과, 내가 이 조직에, 내가 이 상황에서 대체 '왜' 이러고 있는지 항상 높은 곳의 깃발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며

이유없고 무차별적인 수동적 태도로 눈치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목표 깃발까지 도달하기 위한 여러 재료들과 필요한 상황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나의 편안함과 안락함을 자발적으로 양보해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회사생활을 할 것이다.


모든 일은 내 안에서 일어난다.

같은 세상의 현상이어도, 내 안의 태도와 생각, 결심에 따라서

눈치가 될수도, 양보가 될 수도 있다.

도를 닦는 말을 하면서 자기합리화를 하며, 나는 눈치를 보고 있지만 사실은 부처님처럼 양보를 하겠다 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세운 나만의 목표와 이유가 있다면, 그 목표와 이유를 위해 때에 따라서는 무리수를 둘 수도,

손해수를 둘 수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갈수록 공감가는 말이 있다.

당신은 전략가 입니까? 라는 책의 제목이다.


전략가라는 말을 싫어하는 것도 이전에 만들어진 이미지 때문이기에,

그 마음을 내려놓고 올해는 읽어보아야겠다.

드디어 지수를 잊었나보다. 그가 심어준 세계관 중 가장 큰 것이 전략가라는 단어의 이미지 였는데

내 사상에서 그의 색을 다 지우고, 나의 능동적인 가치관으로 채웠다는 것이 느껴진다.

전략가입니까 라는 책을 찾는다는 것.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

영원하길 약속하는 것 만큼 멍청하고 미련한 일이 없다.

영원한건 딱 한 가지 뿐이다.

나의 영원한 동반자는 나 자신이라는 것.

절대 결코 인생은 혼자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인정하고 가는 순간, 나머지는 모두 플러스 알파가 되어 더욱 소중한 존재가 된다.

내 인생에 나라는 동반자 하나로도 든든하고 충분했는데,

너까지, 당신까지, 이사람까지, 그리고 또 저사람까지, 나와 함께가자고 하니

나는 부자가되는 것이다.

관점의 차이이다. 남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관점이냐,

내가나를 너무 사랑하다보니 남들 눈에도 내가 사랑스러어보이는 능동적인 관점이냐,

현상은 같아도 내 안에 생각은 매우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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