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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쿠나마타타 Mar 10. 2021

객체는 일정하다. 관건은 감정이다.

일상으로 부터 떠나온 지금,

낯선 곳에서 조용한 나무들 사이에서 내가 맞고 있는 이 햇살은,

서울 강남에서 내가 맞던 햇살과 다르지 않다.


지금 나오는 이 노래는,

처음 들어보는 노래지만, 익숙한 기계음과 비슷한 패턴들

서울 여의도에서 내가 듣던 것들과 다르지 않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자판을 누르는 손가락, 골똘히 고민하는 뇌주름 하나하나까지도

내가 과거에 도시에서 가지고 있던 것들과 바뀐 것은 하나도 없다.

부는 바람도, 마시는 공기도, 호흡하는 내 폐도 머리도 몸도 손도 얼굴도 뭐하나 새로울 것이 없다.

다만 내가 느끼는 감정의 필터가 다른 것이다.

같은 하늘을 바라보아도,

같은 바람을 느껴도,

다르게 받아들이고 다르게 해석하고 나에게 다른 영감을 준다.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같은 햇살, 같은 바람, 같은 농도의 공기인데 무엇하러 시간을 내서 먼 곳 까지가서 그 햇살 아래 앉아있을까?

주말이면 내가 무엇에 홀린듯 노트북과 노트를 챙겨들고 교외 까페를 찾는건 왜일까.

집에서 마시는 커피에도 비슷한 향과 맛이 있고,

지금 듣는 비슷한 느낌의 노래를 집에서도 하루 온종일이고 틀수 있다.

왜 사람들은 같은 객체를 느끼러 새로운 환경에 가는 것일까.


언젠가 들린 미술관에서 사진 촬영이 허락된 전시관에 드러서서 너무도 우스운 장면을 보았다.

거의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작품앞에서 약 10초 정도 서있다가 스치듯이 그 작품을 지나갔다.

그 10초의 시간도 작품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아니었다.

바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시간이었다.


지금 현장에서 작품을 앞에두고 감상하지 않는 이들이,

사진을 찍어가서 그 사진을 어디에 쓰는 걸까?

작품을 깊게 남기고 싶고 오래 간직하고 싶다면 그 자리에 서서 그 조명과 그 고요 속에서 조금 더 들여다보면 될일이 아닐까.

사진으로 남겨서 스쳐 지나갈만큼 바쁜 삶에서 미술관은 왜 들린걸까?


삶도 비슷하다.

눈 앞에 놓인 미술작품 한 점이라는 객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사실 사진으로 찍어 간직하던 머리속에서 간직하던, 혹은 과거의 그 작품이 그리워 구글에서 검색해서 모니터를 통해 쳐다보던, 중요하지 않다.

그 그림은 털끝하나 변하지 않고 영원속에서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금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내 감정의 필터링이다.

놓여 있는 이 상황에서 같은 작품이어도, 같은 햇살이고 같은 하늘이고 같은 바람이어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지, 그것을 투영한 내 감정의 필터는 무엇을 느끼는지 어떤 생각을 들게하는지,

같은 물체여도 받아들이는 내 필터의 컨디션에 따라 다른 것인데,

지금은 쳐다도 보지 않는 그 작품을 카메라렌즈로 10초만에 찍어가면, 

그사람은 다시 그 사진 파일을 열어보고 무엇을 느낄까.

우스운 일이다.



받아들이기.

그것이 관건이고 중요한 포인트이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자유자재로 조율할 수 있다면 도를 닦는 사람이겠지.

그것이 어려우니까 새로운 감정과 새로운 생각에,

나의 내면과 조용한 소리에 조금 더 집중하기 위해서 새로운 환경을 찾고 낯선 곳에 간다.

그렇게 외부의 물리적인 환경을 바꾸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소심하고 조용한 나의 내면의 생각에 더 잘 귀 기울일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감정의 필터로 세상을 바라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햇살이어도, 바람이어도, 공기여도 새로운 느낌으로 내게 다가오기 때문에 그런것들이 좋은 것이다. 그것들이 필요한 것이다.


같은 미술작품을 모니터가 아닌 전시관에서 봐야하는 이유도,

기분 좋은 봄 바람을 한강변이 아닌 처음 와보는 어떤 낯선 곳에서 느껴야 하는 이유도,

비슷한 템포의 노래를 이어폰이 아닌 낯선 공간의 스피커로 들어야 하는 이유도,

언제나 써내려가던 글을 내 책상이 아닌 낯선 카페의 맘에 드는 테이블에서 써야하는 이유도,


감정의 필터를 바꾸어 세상을 달리 보기 위해서다.


새로운 것에 집중할 수 있고,

그 자리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만큼 익숙한 것들로부터 감사와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객체는 일정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고, 어찌보면 다를 것 하나도 없는 익숙한 것들이다.

관건은 감정이다.

색다르게 해석하는 것도, 여유를 가져다 주는 것도, 감사와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뇌의 사고방식을 바꿔주는 것도 모두 감정의 필터이다. 같은 것을 바라보지만 다른 영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자주 떠나와야하는 이유이고,

자주 쓰고 남기고 기록하여야하는 이유이다.

같은 햇살을 보고도 1년 전의 나는, 3년 전의 나는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똑같은 감정의 필터를 장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중하고 애닳팠던 그 날만의 특별한 감정의 필터가 그대로 증발하는 일이 너무 안타깝고 아쉽기 때문이다.

지금의 특별하고 소중한 필터가 여전히 계속 내 글을 통해 그 자리에 박제되듯 남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도 간절하게 써내려가고 기록해야한다.


그 필터가 특별하고, 감성적이고, 약하고, 말랑하고, 예민할 수록

보존되기 어렵고 다시 만나기 힘들고 더 풍부한 감정의 변화와 영감과 감성을 줄수록

더욱 세심하고 정교하게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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