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이브(루시 드베이 분)는 여성이란 이유로 상사에게 무시를 당한다. 스트레스를 풀고자 클럽에 들른 이브에게 한 남자가 치근덕거리고 이름 없는 남자(아리 보르탈테르 분)의 도움을 받는다. 위기를 모면한 이브는 이름 없는 남자에게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의 진짜 정체는 여성들을 납치해 성폭행하고 그 모습을 찍는 새디스트 살인마였다. 이름 없는 남자와 공범(키아란 오브라이언 분)에게 납치당한 이브는 갑작스러운 자동차 사고를 틈타 간신히 산속으로 도망친다. 두 남자도 자신들의 얼굴을 본 이브를 쫓아 산으로 향한다.
서양의 오래된 구전동화 <빨간 두건>(우리나라에선 '빨간 모자'나 '빨간 망토'로 불리곤 한다)은 빨간 두건을 쓴 소녀가 할머니에게 병문안을 가는 길에 늑대를 만나는 내용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수상한 사람을 경계하고 숲은 위험하니 함부로 가지 말라는 교훈을 일깨워 주었다. 한편으론 여성을 노리는 남성의 폭력성에 대한 은유이기도 했다.
<빨간 두건>은 오랜 역사를 지닌 작품이니만큼 다양한 시, 책, 연극 등으로 새롭게 만들어졌다. 영화화된 판본도 상당하다. 근작 가운데 독창적인 재해석을 한 작품을 꼽는다면 <늑대의 혈족>(1984), <프리웨이>(1996), <레드 라이딩 후드>(2011)가 유명하다.
<늑대와 빨간 재킷>은 늑대 같은 살인마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도망치던 이브가 내면의 본능을 깨닫고 오히려 응징에 나선다는 파격적인 전개를 선보인다. 고전 <빨간 두건>을 19금 잔혹 동화로 그로테스크하게 비튼 <늑대와 빨간 재킷>의 연출은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로 칸영화제 경쟁부문과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오른 바 있는 뱅상 파르노드 감독이 맡았다.
<늑대와 빨간 재킷>은 빨간 옷(두건)을 입은 여자, 숲속의 추격, 늑대와 다름없는 인간, 할머니와 사냥꾼 등 동화에서 접했던 친숙한 요소를 오늘날 현실로 옮기되 환상적인 색채를 가미하는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그리고 <빨간 두건>이 보여준 '숲'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었다.
<늑대와 빨간 재킷>에서 인간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늑대 같은 살인마는 시종일관 이브를 위협한다. 이브가 처한 상황으로 시야를 넓히면 여성을 무시하는 직장 상사니 여성에게 추파를 날리는 클럽의 남자도 야만적인 늑대이긴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쫓기던 이브는 앞선 여성 복수극 <리벤지>(2017)의 젠(마틸다 안나 잉그리드 루츠 분)이나 <아무도 없다>(2020)의 제시카(줄스 윌콕스 분)처럼 남성의 지배와 폭력에 맞서기 시작한다. 숲은 위험한 공간이 아닌, 이브를 지켜주고 회복시켜주는 공간으로 의미가 바뀐다.
늑대의 야만성을 남성에 국한하지 않는 점도 흥미롭다. 극의 배경이 도시에서 자연, 다시 도시로 변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모델하우스와 그곳에 들른 부부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성이 있다.
인간은 자연을 개발해 산업화, 도시화, 현대화를 일구며 진화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영화는 차별, 폭력, 혐오 같은 늑대의 '야만적' 요인들이 여전히 가족, 직장 등 사회 구조에 존재하고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배경과 공간을 통해 강조한다. '야만적'이라 여겼던 자연(숲)에서 이브가 각성하는 전개는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인간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과정으로 읽어야 한다.
<늑대와 빨간 재킷>은 현실을 기반으로 삼은 환상 동화에 가깝다 보니 일반적 눈높이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다분하다. 동화, 공포, 코미디, 스릴러가 뒤섞인 통에 뒤죽박죽이라 느낄 여지도 많다. 극 후반부에 나오는 페인트볼 서바이벌 게임 장면처럼 지나치게 추상적인 연출은 난해함을 더한다. 스타일은 독특하나, 상업영화로서 재미는 분명 떨어진다.
<늑대와 빨간 재킷>은 고전 동화를 현실에 맞추어 재해석한 노력에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또한, 여성의 복수극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978)와 다른 결을 지닌, 현대적 여성 복수극 <리벤지>, <아무도 없다>, <프라미싱 영 우먼>(2020)과 함께 묶어서 읽어야 할 텍스트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는 미투 시대엔 이런 영화와 시도가 더욱 많이 필요하다. 제53회 시체스영화제 오피셜 판타스틱 경쟁부문 초청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