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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후 Jul 31. 2021

영화 리뷰 <개미>

거짓 정보로 공포 자극, 놀라운 예언 담긴 24년 전 '애니'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신분에 따라 평생 땅을 파고 흙을 옮기는 삶에 염증을 느끼고 바깥세상으로 나가길 꿈꾸는 일개미 Z-4195(우디 앨런 목소리 분). 어느 날 Z는 일개미들의 술집에 몰래 놀러 온 발라 공주(샤론 스톤 목소리)를 만나 첫 눈에 반한다. Z는 공주를 다시 만나기 위해 친구인 전투개미 위버(실베스터 스탤론 목소리)에게 부탁해 역할을 바꿔 사열식에 참석한다. 그런데 전투개미 사령관 맨디블 장군(진 핵크만 목소리)은 사열식에 참석한 여왕개미 근위대에게 흰개미들의 근거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엉겁결에 Z는 전쟁터로 보내진다.


할리우드에선 유사한 콘셉트를 다룬 영화가 엇비슷한 시기에 잇따라 극장가에 걸리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심해를 배경으로 한 <심연>(1989)의 개봉을 앞두고 먼저 선보인 <딥 식스>(1989)와 <레비아탄>(1989)이 대표적인 경우다. 행성 충돌을 그린 <딥 임팩트>(1998)와 <아마겟돈>(1998), 화산 폭발을 소재로 삼은 <단테스 피크>(1997)와 <볼 케이노>(1997)가 맞붙기도 했다. 곤충이 주인공인 CG 애니메이션 <개미>(1998)와 <벅스 라이프>(1998)의 격돌도 빼놓을 수 없다.


<개미>는 <슈렉> 시리즈, <쿵푸 팬더> 시리즈, <크루즈 패밀리> 시리즈, <드래곤 길들이기> 시리즈, <마다가스카> 시리즈, <보스 베이비> 시리즈, <트롤> 시리즈 등으로 친숙한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 만든 첫 번째 작품이다.


자신을 해고한 디즈니의 CEO 마이클 아이스너에게 앙심을 품은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전 회장이자 드림웍스의 공동창업주인 제프리 카첸버그가 당시 디즈니에서 제작 중이던 <벅스 라이프>를 겨냥해 비슷한 콘셉트로 만들되 더 빨리 개봉시킨 비화도 유명하다.


또한 초호화 배우진 캐스팅, 다양한 패러디 가미, 성인에게 맞는 유머 코드 삽입, 동화적인 디즈니와 다른 전형성을 깨는 전개 등 이후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스타일과 방향을 제시한 작품이기도 하다.



<개미>는 우디 앨런, 샤론 스톤, 진 해크만, 실베스터 스탤론, 제니퍼 로페즈, 크리스토퍼 월켄, 댄 애크로이드, 앤 밴크로프트, 대니 글로버 등 목소리 연기에 참여한 배우진의 면면이 화려하다. 가장 눈에 띄는 배우는 우디 앨런이다. <개미>는 신경질적인 투덜이 뉴요커 우디 앨런을 그대로 투영시켜 '우디 앨런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라면 어떨까?'란 팬들의 상상을 실현시킨다.


<바나나 공화국>(1971), <슬리퍼>(1973) 등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았던 사람이라면 <개미>의 첫 장면에서 나뭇잎 소파에 누워 의사에게 "대도시에서 죽어라 일만 했어요. 그게 문제였던 것 같아요. 사람들과 섞이면 언제나 불편하고 닫힌 공간에선 공포심이 생겨요"라며 현대 개미의 고민을 털어놓는 Z를 보며 웃음을 참기 어렵다. 이외에도 영화 곳곳엔 우디 앨런의 유머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흰개미와 전쟁을 앞두고 "선거자금을 줘서 그쪽 정치인을 매수하는 게 어때?"란 드립을 치는 Z를 보노라면 우디 앨런에게 시나리오 감수를 받은 느낌마저 든다.


<개미>는 어린 세대에게 절대 왕정과 자유주의,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신분제 폐지와 노동자의 권리 투쟁 등의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불량품 개미를 없애고 새 출발을 하겠다는 맨디블 장군의 계획은 나치즘과 판박이다. 맨디블 장군은 "개인의 인생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왕국이다. 개인은 왕국을 위해 존재하며 왕국을 위해 싸우고 죽는다"라며 전체주의를 강조한다.


반면에 Z는 "평생 동안 왕국을 위해 일하라지만, 제 인생은 어쩌란 거죠?"라며 개인주의에 우선한다. 그를 중심으로 개미 왕국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생산의 주역이 실은 일개미"들이라며 일개미들이 투쟁을 벌이는 장면도 나온다.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을 연상케 하는 실로 날카로운 정치, 사회 풍자극이다.



개미 부대와 흰개미 부대가 싸우는 전투 장면은 <스타쉽 트루퍼스>(1997)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를 방불케 하는 스펙터클과 처절함으로 가득하다. 흰개미들이 내뿜는 산에 녹아내리는 개미들의 모습은 이전 전체관람가 애니메이션에서 보지 못했던 과감한 묘사다.


심지어 Z와 함께 전쟁에 참전한 바베이터스(대니 글로버 분)는 목만 남은 채 "넌 나처럼 되지 마. 평생 명령만 따르지 말고 네 인생을 스스로 선택해"란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완벽한 반전 애니메이션이 아닐 수 없다.


1997년 개봉한 <스타쉽 트루퍼스>는 전체주의의 위험성과 전쟁의 참상을 경고했다. 다음 해 공개한 <개미>엔 맨디블 장군이 흰개미들이 침략한다는 거짓 정보로 사회의 공포를 자극하는 설정이 담겨 있다. 그리고 몇 년 후, 9.11 테러를 겪은 미국은 잘못된 정보로 이용해 실체가 없는 적과 싸우는 테러와의 전쟁에 들어갔다. 돌이켜보면 <스타쉽 트루퍼스>와 <개미>는 시대의 징후를 미리 포착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놀라운 예언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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