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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후 Aug 01. 2021

영화 리뷰 <애플>

'기억상실증' 남자의 인생배우기... 의미심장한 질문


기억상실증 유행병 진단을 받은 알리스(알리스 세르베탈리스 분)는 시간이 지나도 자신을 찾는 가족이 나타나지 않자 병원에서 권유하는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새로운 경험으로 새로운 기억과 정체성을 만드는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에 따라 자전거 타기부터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기까지 병원으로부터 받은 미션을 수행하고 이를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남기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느 날, 알리스는 극장에서 자신처럼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안나(소피아 게오르고바실리 분)를 우연히 만난다. 그녀는 어려운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며 알리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알리스와 안나는 함께 시간을 보내며 급격히 가까워진다.


서구에선 2008년 그리스의 경제 위기 이후에 나타난 그리스 영화의 경향을 'Greek Weird Wave(그릭 위어드 웨이브)'라 칭한다. 그리스의 사회, 경제적 문제를 소재로 삼고 기괴함과 초현실주의적 색채로 가득한 블랙코미디를 특징으로 하는 '그리스의 낯선 경향'의 시작은 <더 랍스터>(2015), <킬링 디어>(2017),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 등으로 친숙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송곳니>(2009)다. 이후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알프스>(2011), 아디너 레이첼 창기리의 <아텐버그>(2010), <더 캡슐>(2012), <슈발리에>(2015) 파노스 H. 코트라스의 <스트랠라>(2009), 바비스 마크리디스의 <엘>(2011) 등으로 짧은 전성기를 꽃피웠다.


 

갑자기 기억상실증 진단을 받은 남자가 병원의 제안으로 새로운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벌어지는 여정을 담은 <애플>도 '그릭 위어드 웨이브' 계보에 포함될 작품이다. 연출과 각본을 맡은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은 <송곳니>의 조감독으로 참여한 경력이 있다. 그리스 사회의 정체성과 소통 문제를 원인불명의 기억상실증 유행이란 기발한 상상력으로 접근한 점에서도 그렇다.


<애플>에 책임 프로듀서로 참여한 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애플>이 "언제 봐도 강렬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다. 특히 팬데믹의 시대에 더 시의적절한 영화"라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관객 각자에게 가닿는 답을 안겨줄 것"이라고 설명한다.


<애플>에서 눈길을 끄는 건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이다. 알리스는 병원에서 준 자전거 타기, 영화 보기, 사교 활동하기, 술집에 가기, 이성 친구 만들기, 죽기 직전의 환자 돌보기 등 미션을 성실히 수행한다. 이것은 한 사람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 중년, 노년에 이르는 인생의 여정을 아우르는 인상이 짙다.


<애플>이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과 실재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존재인 안나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건 기억의 회복이 아니다. 상처 받은 내면과 잊고 싶은 기억을 스스로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다.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은 단편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며 "정체성, 상실, 기억, 그리고 고통에 관한 모든 질문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상실을 겪은 이가 떠난 내면 또는 기억 속으로의 슬픈 여정을 <애플>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2015)처럼 말이다.



도입부에 영국의 민요이면서 사이먼 앤 가펑클의 곡으로도 친숙한 'Scarborough Fair(스카브로 페어)'가 흐른다. 영화의 주제와 맞닿는 의미심장한 선곡이다. '스카브로 페어'는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가 머나먼 곳에 있는 사랑하는 이를 향해 자길 잊어달라는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다. '스카브로 페어'가 흐르던 집을 떠났던 알리스는 마지막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잊고 싶었던 기억을 상징하는 사과를 베어 문다.


<애플>은 '우리는 경험했던 것을 모두 기억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기억하기로 선택한 것만 기억하는가?', '우리에게 상처를 준 기억을 잊을 수 있을까?', '아픈 기억을 딛고 삶을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 등 간단치 않은 질문을 던진다. 그렇기에 "알 수 없는 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일까?(이용철 평론가)"란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셀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2005)이나 데이빗 로워리의 <고스트 스토리>(2017)만큼 놀랍진 않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잊고 싶은 기억들 사이에서 던진 흥미로운 질문임을 분명하다. 제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경쟁부문 최우수상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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