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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ICA Jun 01. 2020

내 여행인생의 첫사랑, 뉴욕

잔칫상 같은 도시-NY 첫 방문기(2011)

2011년 1월 말, 서울과 뉴욕이 모두 폭설로 인해 비행 당일 항공편이 연달아 결항되거나 지연이 되어 꽤나 혼란스러웠던 겨울날. 나의 첫 뉴욕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날의 사연은 말로다 못할뿐더러 당황스러운 일이 연달아 이어져 기억도 뒤죽박죽이다.


혼이 쏙 빠져 도착한 JFK공항.

서로 다른 항공편을 타게 된 일행과 열다섯 시간 만에 만나고 나니, 지난 하루의 고생이 주르륵 스치며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집을 나선지는 이미 스무 시간이 훌쩍 넘어있었다. 긴장과 불안이 극에 달해 비행기 안에서 한순간도 잠들지 못한 채 퀭한 눈으로 수하물을 찾으러 가니, 나의 거대 캐리어의 바퀴 한 개가 몸체에서 떨어져 큰 수레에 함께 담긴 채 덜그럭 소리를 내며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때의 내 뇌는 몸에서 떨어져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접한 그 어떤 시공간에 가있었는데, 난 와중에도 상체가 자동차 앞유리만 한 공항직원에게 박스테이프를 빌려 캐리어와 바퀴를 동여맸다. 둘(캐리어와 바퀴)을 야무지게 연결시키고 입국장으로 나온 일화는, 스스로가 기특했던 순간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추후 항공사에 민원을 넣어 집채만 한 새 캐리어를 보상받았다.)


맨해튼 첫 입성


JFK 공항을 떠나 30분간 달려 맞은편에 눈에 익은 맨해튼 마천루가 보일 때 즈음에서 야, 뉴욕에 도착한 실감이 났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티파니에서 아침을, 러브 어페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뉴욕의 가을, 프렌즈 위드 베네핏, 섹스 앤 더 시티, 프렌즈....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영화, 드라마, 뮤비, 심지어 뉴스에서까지 접하며 내 안에 자리 잡은 지가 이미 오래인 ‘그 뉴욕’.

맨해튼에 들어서니 진짜 그 뉴욕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빌딩 숲 사이 피어오르는 수증기, 노란 택시, 좁고 밀리는 차도, 바싹 붙어있는 저층 아파트, 비상계단, 일방통행 사인물까지.


뉴욕이다, 뉴욕!


뉴욕_첫 _숙소_view.jpg

내 첫 뉴욕 여행의 숙소는 같이 간 일행의 친구 아파트. 집주인은 3주간 가족이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에 갔고, 그사이 비어있는 집을 2주간 사용하기로 했다. 아파트는 기대보다 좁긴 했지만 상당히 고급 아파트로, 그간의 경험상 서양인들이 특히 선호하는듯한 특유의 향이 로비에서부터 폴폴 났다. 유니폼을 입은 도어맨이 열어주는 문을 지나 집주인이 맡겨둔 키를 받고 40층으로 올라갔다. 집 현관 열쇠는 문을 밀며 돌려야 하는 그때 당시 상당히 생소한 기술을 필요로 했는데, 이후 여러 외국에서 열쇠 이용 시 이날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높은 아파트 창밖으론 폭설의 기운이 그득 담긴 뿌옇지만 멋진 뷰가 보였다. 마치 박쥐 라이트를 하늘에 쏘면 2분 안에 배트맨이 날아올 것 같은 고담시 시민이 된 기분이 들었다. 간절하고 간절하던 샤워를 하며 묘한 기분과 지난 서른 시간 동안의 고행 기운을 함께 씻어 내고 나서야 비로소 여행을 시작할 에너지 충전이 가능할 법한 상태가 되었다.


눈으로 만든 커플 옆에 앉아보았지@하이라인파크

신고 갔던 어그부츠는 눈 쌓인 길거리를 걷기엔 역부족. 한가득 쌓였던 눈이 녹으며 바닥은 물기가 가득해져 뉴욕 도착 이튿날, 어그부츠는 이미 물이 스며들어버렸다.

따로 가져간 신발이라곤 공연장이나 레스토랑을 갈 때 신으려고 준비한 구두뿐, 이 도시를 다니기 위해선 장화가 필요했다. 첼시와 미트패킹 중간쯤에서 같이 간 일행과 나란히 장화를 사신고 나니 발걸음이 한결 편해졌다.


객사한 어그부츠를 보내고 새로 사신은 장화

장화가 생기고 나선 궂은 날씨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쏘다녔다. 아침 7시에 기상해서 온종일 쏘당기다 저녁에는 뮤지컬이나 재즈, 클래식 공연까지 보고 숙소에 돌아오면 자정이 되는 날이 꽤 있었다. 중간엔 일행과 흩어져 각각 뉴욕에 사는 친구를 만나 새벽까지 거나하게 술을 마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체력이 어찌 그 일정들을 버텨냈는지 신기할 따름.



이 여행 중 눈물이 차오른 경험이 두 번 있었다. '그라운드제로' 인근 '트리니티성당' 앞을 지나는데 미니콘서트 안내 입간판이 놓여있었다. 마침 시간도 곧 이길래 성당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트리니티 성당에서 관람한 미니 콘서트


잠시 기다리니 연미복과 블랙 칵테일 드레스를 근사하게 차려입은 중창단이 등장해서 아름다운 화음을 뽐내기 시작했다. 공연 때문인지, 공간 덕인지, 우연히 그때의 감동 분자가 유독 적극적이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공연을 보던 중 행복의 눈물이 맺혔다.


내가 뉴욕에서 이런 공연을 다 보다니, 행복해.


두 번째 눈물이 차오른 것은 뉴욕대 앞쪽에서 아점을 먹는 중, 그야말로 생뚱맞은 타이밍이었다. 각종 영화나 미드를 통해 많이 접한 딱 그 '미국식당'이었다. 가로면이 긴 직사각형형, 가로면 중간 바 테이블이 있고, 바 테이블 손님 뒤쪽으로 세로면을 따라 테이블석이 일렬로 네댓 개 정도. 손님이 들어오면 커피부터 권한 뒤, 커피를 따라주고나서야 오늘의 메뉴를 설명해주는 곳. 늘 구경하던 장면 안에 들어와 직접 경험을 하다니. 그 순간 신기함과 행복이 스치고 나서 급작스레 분통이 터졌다.

 

아, 뉴욕에 진작 올걸! 20대에 올 걸!


이전에도 해외여행을 몇 차례 다녀봤지만 뉴욕처럼 강하게 내 마음을 흔든 곳은 처음이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내 여행인생의 첫사랑!


메트로폴리탄 뮤지움에 들어선, 왠지 비장한 내 뒤태

센트럴파크를 포함 공원들을 몇 차례나 누볐고, 맨해튼 꼭대기로 올라가 콜롬비아 대학 구경을 했다.

맨해튼 중심에는 문화 공간이 넘쳐났다. 각종 박물관과 미술관, 브로드웨이 공연장과 링컨센터.

신작 뮤지컬 두 편과 사랑해마지않는 뮤지컬 '빌리엘리어트' 를 관람했고, 링컨센터에선 웅장한 오케스트라 공연도 관람했다. 여행 중간에 끼어있던 내 생일날 카네기홀에서 화려한 공연을 봤는데, 여권에 있는 내 생일을 확인한 박스오피스 매니저가 선뜻 생일 축하한다며 카네기홀에서 운영하는 후원금을 적용하여 할인을 왕창해 주기도 했다.

섬 아래로 내려가 리틀이태리, 차이나타운에 들러 맛있는 것도 잔뜩 먹었고, 월스트리트, 피어 16, 배터리 파크를 지나 페리를 타고 시간탐험대 거인 바바의 구애에 끝까지 철벽 치던 도도녀 자유의 여신상 언니도 만났다. 맨해튼 곳곳뿐 아니라 당시 막 핫해지기 시작했던 윌리엄스버그와 브루클린, 심지어 할렘까지 찍으며 열흘이 넘는 시간을 정말 야무지게 보냈지만... 난 아직도 뉴욕 곳곳이 궁금하기만 했고, 이 재미있는 도시의 여행을 마쳐야 하는 아쉬움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여행을 하루 남긴 날, 오레오와 블랙베리를 집어먹으며 빨래 건조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아침.

난 이곳에 곧 다시 오리라 결심을 했다. 그 결심은 결코 나풀나풀 가볍지 않았기에, 다음 해 가을 난 뉴욕에 도착해있었고, 이후로도 몇 차례 더 뉴욕을 다녀왔다.



뉴욕 안에는 그야말로 전 세계의 문화가 담겨있는 듯. 조금 과장하자면 코너를 돌 때마다 새로운 문화가 펼쳐지는 곳이었다. 다른 어떤 도시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온갖 것들이 등장하는 도시.

먹성 좋은 1인으로써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굳이) 음식으로 비유해보자면, 한국 잔칫상 같은 도시였다. 갈비도 맛있고, 잡채도 맛있고, 오이소박이도 맛나고, 생선찜도 죽이는데.. 아직 음식 종류는 많이 남아있다. 다 먹어볼 수 있을까 조바심이 나면서도 그 욕심이 버려지지 않는다. 금방 배부른 내가 원망스럽고, 사정상 지금 못 먹은 음식을 다음에라도 꼭 먹어보고 싶은, 그런.... (나처럼 식탐 있는 사람의) 잔칫상.


윌리엄스버그의 식료품점


이 글을 쓰면서도 뉴욕에 또 가고 싶다.

뉴욕 특유의 혼잡함과 생생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사이렌 소리에 잠을 설치는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일어나 작은 카페에서 머핀과 커피를 마신 뒤, 브로드웨이 극장에 줄을 서서 티켓을 구매하고, 붉은 핏물이 보이지만 끝내주게 맛있는 버거를 먹은 다음 주변 공원에 가 잠시 멍을 때리다가, 쌔끈한 옷으로 환복을 하고 예매해둔 공연을 본 뒤, 블루문 여섯 개 들이와 치즈피자 한 조각을 포장해오고 싶다.



여전히 그리운 첫사랑
Newyork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 같기도 하고,
특별할 것은 없지만 나에겐 소중한,
여행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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