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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도둑 Nov 09. 2017

예비군에서 졸다가

예비군을 다녀왔다. 예비군이 그렇듯, 정신 교육시간에 끔뻑끔뻑 졸았다. 점심에는 도시락을 줬는데 꽤 잘 나왔다. 어제는 돈가스, 생선가스였고 오늘은 돼지 불고기에 튀긴 만두가 나왔다. 양도 꽤 많아서 다 먹고 나면 배가 불렀다. 맡겨뒀던 휴대폰을 다시 받아서 건물로 들어갔다. 동미참 훈련 때, 오전은 자율 참여 훈련을, 오후에는 주로 정신 교육을 받았다.


자율 참여 훈련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추운 곳에서 기다리다가 수류탄 투척, 사격, 수색, 각개전투 등을 수행하는데 많은 인원이 교육받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이런 오전 일정을 보내고 꿀맛 같은 점심을 먹고 나니 당연히 졸릴 수밖에.


그렇게 나는 졸았다. 점심시간부터 정신교육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앉아서 졸다 보니 목이 아팠고,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면서 졸았다. 앞에서 강연하시는 분을 신경 쓸 틈도 없었고, 그 누구도 깨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투복을 입고 눈을 감고, 눈을 뜨니 전투복이었다.


몽롱한 정신 사이로 나의 군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왜 혼났더라, 그때 집합했을 때 뭐라고 욕먹었었지? 아, 그 중사가 부조리 적발해서 단체로 영창 가고 편해졌었지, 그때 나 많이 도와줬던 형은 잘 지낼까, 나랑 잘 지내던 동기는 뭐 하고 있을까. 내 편의를 많이 봐주던 안전 장교, 보급관, 행보관, 군수과장들은 잘 지낼까. 그때 상황 서면서, 당직 서면서 같이 바둑 뒀을 때 재밌었는데.


정신을 차리니까 위에서 교육을 하던 장교는 없었다. 대신 뒤에서 마이크로 방송하는 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1조부터 앞으로, 앞으로 퇴장하시기 바랍니다."


아. 끝났구나. 내 군생활은 이미 끝난 지 오래였지, 참. 이제 예비군도 끝나가는구나. 그때 만났던 수많은 군인들, 병사들, 형들, 친구들, 동생들은 잘 지낼까.


밖으로 나오니 쌀쌀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울긋불긋 예쁘게 물든 단풍이 떨어지는데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군복을 입어서 그런가, 그저 귀찮은 쓰레기로 보였다. 아, 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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