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
[지나간 황금시대에 대한 갈망은
현재에서 만족하지 못한 이들의 욕심이다.]
생각 없이 본 영화는 생각보다 재밌었고, 생각보다 짧았으며, 생각보다 어이없이 끝났다. 길 펜더는 약혼녀와 함께 파리에 도착한다. 홀로 산책하다 길을 잃은 그는 12가 넘어간 종소리를 들으면서 1920년대의 시간 속으로 미끄러진다. 그곳에서 유명한 작가들과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길 펜더가 쓴 소설의 도입부가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그녀는 소설은 그만두고 본업에 치중하라는 약혼녀와 다른 매력을 느낀다.
길은 약혼녀와 맞지 않는 구석이 많았다. 그가 산책을 원할 때 그녀는 춤을 추고 싶어 했다. 그녀는 그가 가고 싶어 하던 레스토랑보다 베르사유 궁전을 원했다. 길 펜더는 약혼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들이나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홀로 파리의 길거리를 배회한다.
그가 영화 각본 대신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이유도 이런 현재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1920년대를 동경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약혼녀는 똑똑하고 잘생긴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고, 약혼녀의 가족들은 은연중 그를 무시한다.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황금시대를 꿈꾸는 이유는 현재 나의 모습에 대한 불만이다. 지금 나의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바꾸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 것이다.
그가 동경하는 시대의 파리는 유명한 예술가들이 몰려들 때였다.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피카소, 달리, 콜 포터. 그는 존경하는 작가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 토론하고 글을 쓰면 그들과 비슷해질 줄 알았었다. 과거를 동경하는 그의 모습은 그의 소설에도 투영된다. 소설 속 주인공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초반부 ‘골동품 상점 주인’이라는 대목과 끝부분 ‘현학적 남자와 바람피우는 아내’에서 유추할 수 있다.
길 펜더처럼 과거를 동경했기에 골동품을 팔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 그런 그를 못마땅해하면서 현학적인 남자와 만나는 약혼녀. 그 글을 읽은 헤밍웨이는 약혼녀가 현학적인 남자와 바람피우는 걸 모른다는 게 믿기 않는다고 말한다. 길 펜더는 씁쓸하게 이런 말을 남기고 현실로 돌아간다.
“그걸 ‘부인하다’라고 하죠.”
소설은 곧 현재에 불만족스러워하는 길 펜더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런 소설의 도입부만 듣고도 푹 빠졌다고 말하는 아드리아나도 마찬가지다. 과거는 언제나 자신에게 커다란 매력이 있다고 말하던 그녀 역시 현재에 대한 불만과 실증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코코 샤넬에게 패션을 배우겠다며 파리로 온 그녀는 파리와 예술가들에게 빠져서 파티만 전전한다.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를 시작으로 피카소, 헤밍웨이, 길 펜더. 정작 그녀는 해야 할 공부는 뒷전이다. 할리우드 작가에서 소설가로 전향하려고 하지만, 아무에게도 자신의 소설을 평가받으려고 하지 않는 길 펜더와 닮았다. 막연히 지금보다는 과거가 더 멋지다고 외치는 그들은 닮아 있었고, 닮아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는 아드리아나와 함께 한번 더 과거로 돌아간 길은 고갱과 드가를 만나고 나서야 길은 깨닫는다. 자신이 과거를 동경하는 이유는 현재를 싫어했기 때문이었음을. 과거에 남고 싶어 하는 아드리아나에게 하는 대사들은 사실 길 펜더에게 하는 말과 같았다. 그는 진실한 글을 써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환상을 없애야 했다. 과거의 황금시대에 대한 환상을 말이다.
현재는 불만족스럽고 금방 싫증 나기 마련이지만, 과거 또한 내가 살고 있는 현재가 된다면 결국 똑같아진다. 하지만 그런 길의 설득을 무시하고 아드리아나는 1920년대가 아닌 벨 에포크 시대에 남는다. 길은 혼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돌아가며 그는 헤밍웨이의 조언을 떠올린다.
과거에서 만난 헤밍웨이는 강렬한 인상을 준다. 허세 가득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길 펜더에게 중요한 조언을 던진다. 처음 만나서 작가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하고, 두 번째 만나서는 ‘진정한 사랑’, 마지막 순간엔 약혼녀의 바람까지 말이다. 허세 가득한 이 남자를 숭배하는 길 펜더에겐 무엇보다 간절한 조언이었다. 그 조언은 결국 그가 약혼녀와 헤어지게 만든다.
그는 혼자서 다시 파리를 걷고 걷는다. 이젠 한낮이다. 더 이상 한 밤중이 아니다. 화창한 낮에 걷고 걷던 그는 밤이 되어도 과거로 향하는 차에 오르지 않는다. 그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리 위를 묵묵히 걸을 뿐이다. 더 이상 과거의 환상은 그에게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마음에 든 이유는 프랑스 파리에 대한 환상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파리의 낮과 밤, 비 오는 거리의 산책. 우리가 유럽이란 나라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주인공을 통해서 잘 풀어냈기에 영화는 더없이 아름다워 보인다. 영화의 처음과 끝에는 수미상관처럼 파리의 풍경이 나온다. 불륜과 예술로 얼룩진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가장 큰 요소가 로맨틱한 파리의 풍경이 아닐까.
영화 속 주인공처럼 과거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할 법하다. 우리 또한 현재를 싫어하기에 과거를 동경할 수 있다. 우리가 상상했던 이유는 주인공과 닮아있을까. 파리를 거닐며 생각에 빠진 그를 보여주면서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현재에 만족하는가?'
영화는 박진감 넘치거나 화려함을 보여주기보다는 잔잔한 아름다움과 여운 있는 이야기로 우리를 홀린다. 과거의 시대를 동경하는 차가운 밤보다는 현재의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따사로운 낮을 즐기게 되는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