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의견 주장

by 글도둑

그와 그녀가 마주 앉아 말없이 있었다. 테이블엔 차가운 음료만 녹아내리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다 못한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했던 대화, 기억나?”


그는 그렇게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새하얀 니트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와인색 머플러를 두르고 약간 빠른 걸음

으로 총총총 다가왔다.


“죄송해요, 제가 조금 늦었죠?”


어색한 듯 뒷목을 긁적이던 그는 자신도 방금 왔다며 웃었다. 그는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그 날 무슨 말을 했고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했던 이야기 중에서 그녀가 가장 크게 반응했던 주제만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가 친구들을 통해서 소개팅을 간신히 얻어내면서 들었던 생각이니까.


“있잖아요, 이상하게 소개팅해달라는 남자가 여자보다 많은 거, 아세요??”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문했다.


“네? 왜요?”


“음, 이상하게 제 주변에 소개팅해달라는 남자애들은 많고, 여자애들은 없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하게 됐어요. 남성은 여성에 비해 스킨십의 결핍이 있다, 이게 제 결론입니다.”


“아니, 그게 왜 그렇게 결론이 나요? 왜요?”


그녀가 호기심을 갖는 것 같자, 그는 신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봐요. 우선 남자들은 여자들에 비해서 스킨십을 안 해요. 가족들 사이에서도 그렇고, 동성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렇고. 조금 더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죠. 우리는 어렸을 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살아요. 그렇게 사랑받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보통 부모님이나 친척, 주변 사람들은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죠. 때로는 언어로, 때로는 행동으로.”


그는 아메리카노를 호호 불다가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호기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는 자신의 의견에 그녀가 귀 기울여준다는 것에 신이 나서 말했다.


“가장 강하게 사랑을 받는다고 느낄 때가 언제였을까요? 아무래도 스킨십받을 때가 아닐까요? 아, 이상한 스킨십이 아니라, 왜 아기들 귀엽다고 쓰다듬고, 뽀뽀하고, 안아주고 그러잖아요. 연인들이 하는 스킨십이 아니라, 그냥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방식의 스킨십이요. 네, 맞아요. 우리는 스킨십으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어요. 그런데 남자들의 경우,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문제가 생기는 거죠. 학창 시절, 제 기억을 돌이켜보면 머리가 굵어졌다고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이나 뽀뽀, 포옹을 해본 적이 극히 드물어요. 아, 군대 갈 때 부모님 한번 안아드렸던 게 생각나네요. 물론, 이건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다는 겁니다.”


그때 그녀가 말을 끊었다.


“근데, 여자들 중에서도 스킨십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걸요? 제 친구도 제가 막 껴안으려고 그러면 피하고 그래요!”

그는 포크로 앞에 있는 케이크를 살짝 떠서 한입에 쏙 넣었다. 입에 묻거나 흘리지 않으려고 조심스러웠다. 그는 우물거리던 케이크를 삼키고 말을 이어갔다.


“스킨십 좋아하는 남자도 있고, 싫어하는 여자도 있죠. 하지만 길가에서 팔짱 끼고 다니는 남자들보다 서로에게 주먹질하는 남자들을 더 자주 보고, 멀리 떨어져서 걷는 여자들보단 서로 팔짱 끼고 돌아다니는 여자들이 더 자주 보잖아요. 단순한 제 경험 기준이지만요.


다시 이야기로 돌아 가보면, 남자들은 그래요. 서로 스킨십을 주고받을 때가 싸우거나 장난칠 때밖에 없어요.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스킨십의 필요성에 대해서 인식을 못한다는 거죠.”


그녀는 빨대로 음료를 휘휘 젓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는 잠깐 말을 멈췄다.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음, 저도 아직은 팔짱 끼고 돌아다니는 남자들은 못 본 것 같아요. 저도 친구들이랑 팔짱 끼고 걸어 다니긴 했는데 남자애들이 그러는 건 아직 한 번도 못 봤네요”


그는 자신의 의견에 슬며시 동의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슬쩍 웃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렇죠? 남자들끼리 팔짱 끼고 걸어 다니면 동성애자라는 의혹 어린 눈초리를 받기 때문에 더욱 그러기 힘든 것 같아요. 차라리 어깨동무를 했으면 했죠. 그런 사회적인 시선이 남자들에게 스킨십의 결핍을 만들어주지 않나 싶기도 하네요. ”


“그런데 스킨십의 필요성? 그걸 인식해야 하나요?”


“유년기에 잔뜩 받던 사랑의 스킨십을 청소년 때 못 받게 되니까 결핍이 생기는 거죠. 원래는 사랑을 듬뿍 받았고, 그 표현을 넘치도록 해주잖아요. 하지만 조금 자라고 나서 부모님, 친척들, 친구들의 스킨십을 거부하게 되면서 결핍이 생기는 거예요. 그걸 그때는 모르다가 나중에 깨닫게 될 때가 있어요.”


그는 일부러 한번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언제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살짝 움찔거리더니 그의 눈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잘 모르겠어요. 외롭다고 느낄 때일까요?”


“네! 맞아요, 비슷해요. 외롭다고 느낄 때. 전 사랑을 하다가 헤어졌을 때라고 생각해요. 끊겼던 스킨십을 다시 시작했다고 또다시 끊기는 순간이죠. 그동안은 잊고 살았던 사랑의 표현들이 다시 생각난 순간이기도 하면서, 그 표현들을 다시 못 느끼게 된 순간이기도 하죠. 그렇다고 친구들이나 부모님께 다시 그런 표현들을 요구하는 것도 불가능하니까 남자들은 결국 또 다른 인연을 찾으려 애를 쓰는 것 같아요. 그 결과가 소개팅이다!라는 거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붙였다.


“그럼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스킨십의 결핍이 적기 때문에 소개팅해달라고 애쓰진 않는다는 거네요.”


그는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그렇죠. 제 의견은 그래서 남자들이 소개팅 시장에 더 많이 나온다. 여성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봅니다. 근데 몇몇 친구들은 그냥 우리 시대 때, 남자들이 더 많이 태어나서 그렇다, 남자들이 더 욕구가 심해서 그렇다,라고 주장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물론, 그런 요소들도 충분히 반영되겠죠. 남자들이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남자의 욕구가 더 심하다는 의견은 결국 스킨십의 결핍과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냥 제가 생각에 불과하시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반응이 꽤 재밌더라고요.”


그녀가 웃으면서 물었다.


“그래서, 저 소개받기 많이 힘드셨나 봐요? 이런 생각까지 하신 걸 보면?”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반문했다,


“티 많이 나요? 그래도 소개받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는 뒷목을 긁적였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그거 아직도 기억해?”


“그럼, 그때 오빠가 왜 이리 열을 내면서 말하는지 신기했으니까. 참 독특한 사람이다 싶었어. 그래서 여태껏 만났던 것 같기도 하고. 나랑은 다르니까 신기했던 거지. 나도 오빠 덕분에 많이 배웠던 것 같아. 오빠처럼 독특한 생각도 해보고, 더 다양한 경험 해보려고 이것저것 도전해보기도 하고. ”


“맞아, 너 예전에 나한테 물들었다고 했던 게 기억나. 그때 네가 막 누가 취미에 대해서 물어봤다고 했잖아.”

“그래, 그때 나도 느꼈어.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다니.”



처음 의견을 주장했을 때, 그녀는 회색 꽈배기 니트를 입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테이블에 턱을 괴고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다 말했다.


“있잖아, 오빠. 어제 스터디하다가 쉬는데, 누가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는 거야. 근데 오빠도 알다시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침대에서 뒹굴면서 노는 거잖아? 그래서 그냥 그렇게 대답했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른 취미는 없냐고, 공강이나 주말엔 뭐하냐고 물어보더라.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공강이나 주말엔 늘 오빠를 만났던 것 같아. 시험 기간이면 같이 카페에 가서 공부하고, 아니면 같이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하고 놀고, 때로는 저 멀리 놀러 가고. 그건 취미라고 할 수 없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


그녀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머그잔을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취미란 게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거라면 연애도 취미 생활이 되지 않을까?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그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면서 답했다.


“되게 재밌는 질문이네. 연애가 취미라. 그럼 취미의 전제 조건을 먼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일단 연애는 둘이서 마음이 맞아야 할 수 있잖아. 취미는 혼자 할 수도 있고, 아 그렇네. 같이 해야 하는 취미도 있구나. ”


그녀는 왼손으로 귀 옆에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빙글 비글 돌렸다.


“그렇지? 취미는 재밌어서 하잖아. 연애도 재밌고. 음, 그리고 취미 생활할 때, 힘들어서 스트레스받기도 하지만, 그만큼 성취감이나 만족도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잖아. 그리고 연애를 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기도 하고, 경험도 많이 늘고 그러잖아.”


그도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리곤 슬쩍 웃으면서 그녀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렇네. 근데 연애는 하다가 끊기기도 하고 대상이 바뀌기도 하잖아. 때로는 상처 받기도, 주기도 하고.”


“왜, 운동하다가 다치면 쉴 수도 있지. 취미 생활도 하다 보면 지루해져서 잠시 쉬었다가 할 수도 있고. 수영 좋아하는 사람이 나중엔 막 스쿠버 다이빙 같은 걸로 대상을 바꾸기도 하니까, 비슷하지 않아?”


“아, 따지고 보면 그렇네. 취미 생활에 연애가 포함되는가. 포함되는 것 같기도 하네.”


“그렇지? 내 생각이 맞는 거지? 취미가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거라면, 연애도 취미인 것 같아. 어느 정도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도 맞고. 또,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깊게 들어갈 수도 있고, 반대로 깊게 파고 들어갔다가 질리는 경우도 있고. 이렇게 하나하나 따져보니까 생각보다 공통점이 되게 많다. 그렇지?”


그는 의자 뒤쪽으로 편하게 기대면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음, 무슨 차이점은 없을까? 우리가 공통점만 생각하는 것 같긴 한데. 아, 이런 건 어때? 보통 연애의 다음은 결혼이라고 생각하잖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다음 과정이랄까? 또, 연애는 서로의 가치관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하잖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다음 과정이 있을까, 그리고 하면서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까?”


그녀는 그처럼 뒤로 기대면서 팔짱을 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왜, 기타를 치다 보면 작곡도 하고 싶어 지고, 오빠처럼 농구 취미로 하다가 대회도 나가보고 그런 거잖아. 취미 생활도 자연스럽게 다음 과정이 생길 때도 있지. 연애하다가 무조건 다음 과정이라면서 결혼으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또, 운동도 제대로 하면 건강에 좋지만, 자세가 잘못되거나 다치면 건강에 안 좋잖아. 근데 왜 자꾸 아니라는 걸로 몰아가려 그래?”


그는 팔짱을 풀고 다시 몸을 앞으로 숙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확인하려고 그런 거지. 너의 의견이 맞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네 주장이 맞는 것 같아. 연애도 취미에 포함되네. 앞으로 막 누가 취미가 뭐냐고 물어보면 이제 당당하게 ‘연애’가 취미예요! 하면 되겠다. 그렇지?”


그제야 그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팔짱을 풀었다.


“그래, 이제 누가 물어보면 대답해야겠다. 연애가 취미라고.”


그는 다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면서 말했다. 조금 뿌듯해 보이는 미소와 함께.


“네가 이런 생각을 주장하다니. 감회가 새롭네. 보통 내가 말하고, 네가 응답하고 그랬는데 말이야. 안 그래?”


지금의 그녀는 그때처럼 의자 안쪽으로 몸을 기대어 팔짱 끼고 있었다. 속이 살짝 비치는 타이트한 검은 티셔츠에 짧은 핫팬츠가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녀는 살짝 찌푸려진 그의 미간을 보고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때부터 내 주장이 서서히 강해졌던 것 같아. 다 오빠 때문이야. 그때 내가 연애도 취미 생활이라고 했잖아. 취미 생활이 지겨워져서 끝내고 싶다고 말하고 싶어. 그동안 좋은 점도 많았지만, 고집 세고 오빠 성격 때문에 많이 힘들기도 했어. 내가 하고 싶은 거 못하게 하고 막 구속하려고 그러면서, 오빠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그는 그녀가 뒤로 몸을 뺀 만큼, 앞으로 몸을 숙이면서 말했다.


“그 이야기는 예전에도 했잖아. 그래서 고쳐나갔잖아. 네가 싫다는 거 안 하고, 좋다는 것만 하려고 노력했잖아. 대체 뭐가 문젠데? 지금 우리가 만난 지 오래돼서, 권태기가 와서, 조금 익숙해지고 편안해져서 그런 거 아닐까.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우리.”


그녀는 무표정했다. 마음 정리가 끝난 것처럼.


“이미 많이 생각해봤어. 오빠랑 다투면 다툴수록, 싸우면 싸울수록, 나는 오빠가 나를 구속하는 것도 싫고, 맨날 하고 싶은 거 찾으라고 잔소리하는 것도 싫어. 그냥 나는 내 생활을 즐기면서 살고 싶은데, 오빠는 미래 준비한다며 공모전에, 대외 활동에, 심지어 대외 활동하면서 막 여자애들도 만나고 그러잖아. 나는 정작 뒷전이고.”


그는 살짝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대외 활동하면서 만난 거지, 단둘이 만나거나 같이 술 마시고 놀러 간 건 아니잖아. 그냥 외국인 교류 프로그램이었다고. 심지어 이거 한다고 미리 이야기도 했잖아. 너에게 허락도 받았잖아. 내가 이제 취준생이라 바빠지고 자주 못 만나고, 잘 못 챙겨 주는 건 미안한데, 어쩔 수 없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그녀는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그를 바라보는 대신,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있잖아, 나는 사랑하면 닮아간다는 이야기가 제일 싫어. 나는 나인데, 왜 누군가를 닮아간다는 거야? 그런 소리는 참 싫은데, 종종 내가 오빠처럼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순간에는 이게 맞는 건지 싶어. 친구들이 그러더라. 많이 변했다고. 처음에는 좋았어. 그런데 오빠와 함께 만나면 만날수록, 내 모습이 아니라 오빠의 모습 보여서 싫어지더라. 모순적인 게 뭔 줄 알아?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걸 좋아했을 거야. 그러면서 내가 오빠를 많이 사랑하는구나 느꼈을지도 몰라. 근데 오빠 덕분에 나는 그런 모습이 싫어졌어. 내가 남들에게 영향을 받고 바뀌는 것도 싫고 반대로 나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게 싫어.”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향? 내가 예전에도 말했지만, 사람은 바뀌지 않아. 다만 본성을 찾아가는 것뿐이야. 우리는 태어난 그대로 살아. 사람은 비어있는 서판이 아니라 이미 쓰인 서판이란 거야. 우리는 다만 뭐라고 쓰였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거야. 내가 너를 바뀐 게 아니라, 너는 너 자신을 찾아가는 거야. 예전에 너의 모습이 기억나. 수줍어했고, 소심했어. 내가 되게 이상한 소리를 늘어놔도 넌 별말 없이 재밌다는 듯 들어줬어. 싫은 내색 한번 안 했고 반박하지도 않았어.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더 가까워졌을 때, 너는 나에 의견이나 주장에 반박하기 시작했어. 때로는 나에게 네 의견을 펼쳐놓기 시작했잖아. 그때 너의 모습은 당당했어. 자신이 맞다고 강하게 주장했었어. 난 그게 너라고 생각했어. 원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싶었어. 그래, 내 생각에 영향받았을 수도 있지. 근데 그건 내가 너를 만든 게 아니라, 네가 너를 깨닫기 시작한 거야. 그냥 솔직히 말하자, 우리. 내가 질렸다고, 다른 사람도 만나보고 싶다고. 네가 예전에 말한 대로, 연애도 취미니까. 취미 생활이 질려서 바꾸고 싶은 거겠지. ”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를 쳐다보다가 다시 음료로 시선을 돌렸을 뿐이다.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던 그는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곤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많이 못 챙겨줘서 미안하고, 너에게 영향을 많이 줘서 미안하다. 근데, 내 생각은 그래. 취미 생활은 바뀔 수가 없어. 더 다양한 취미 생활이 생길 뿐이지. 아니면 테니스를 치다가 라켓이 닳고 닳아서 라켓을 바꿀 뿐이지. 까놓고 말해서, 한 달 전부터 느껴졌어. 네 마음이 붕 떴다는 거. 연락도 안되고, 만나도 별 반응도 없고. 다 티 나더라. 그래도 내가 널 잡으려고 애를 썼던 이유는 딱 하나야. 네가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하는 그 이유 하나. 그거 알아? 생각보다 너는 나랑 닮았어. 그래서 널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근데, 이제 보니 내가 착각했었네. 비숫한 부분도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전혀 다를 수도 있겠더라. 그동안 고마웠어. 친구로 지내자는 말은 부탁이니까 하지 말자, 우리. 왜 그런지는 너도 잘 알잖아. 잘 지내. 알아서, 잘.”

그는 그렇게 자리를 떴다. 쿵쿵 거리는 발걸음으로 문쪽을 향해 내디뎠다.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왼쪽 손은 문을 밀었고, 오른쪽 손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떠나갔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얼음만 남은 머그잔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녀는 그가 남기고 간 머그잔을 쳐다봤다. 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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