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을 세는 소년

2. 하나

by 글도둑

2.

하나.

오늘은 한번일 것이다. 행운이 나에게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올 순간이. 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때로는 세 번, 어쩌면 다섯 번, 가끔씩 일곱 번, 정말 우연히 열, 한번. 행운은 나에게 속삭이곤 한다. 오늘은, 딱 한번일 것이다.


등교하는 길은 우리 집에서 딱 20분 거리다. 그 20분 거리를 버스를 타게 되면 5분이 걸린다. 난 보통 적당히 일어나서 걸어간다. 때로는 눈을 감고 걷는다. 내가 졸면서 걸어갈 수 있나, 궁금해서 그런다. 어젯밤, 소설책을 읽느라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서다. 잠은 잘수록 좋은 거니까.


오늘은 언제쯤 한 번이 찾아올까 궁금해하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붉은색 담벼락을 따라서 쭉 걷다 보면 큰 사거리가 나온다. 그 사거리에서 내가 사는 6단지를 포함한 4개의 단지가 모이면서 자연스레 많은 친구들이 만나서 등교를 한다. 오늘은 아쉽게도 내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혼자 졸면서 걸어야겠다.

빠아앙!


눈을 감고 걷다가 들리는 경적 소리에 눈을 떠보니, 앞에서 커다란 자동차 한 대가 앞을 빠르게 스쳐갔다. 음, 아니다. 이건 아니다. 행운이 이렇게 단순하게 다가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도로였다. 기사님이 운전을 참 잘하시는구나. 그때, 행운이 속삭였다. ‘뒤로 물러서.’


나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딱 한 발자국이었다. 툭, 누군가와 부딪쳤다.


“아, 죄송......? 반장?”


툭 부딪친 사람은 반장이었다. 잘생기고 인기 많은 우리 반장. 1학년 때부터 줄곧 학생회에 들어서, 잘생겨서, 성적이 좋아서, 친절해서 인기 많은 우리 반장. 2학년으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지금도 이미 반장이 되어버린 녀석이었다.


“너 진짜 눈 감고 걸어 다니는구나? 난 소문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네.”


뒤를 돌아보니 그 녀석이 내 가방 끈을 붙잡고 있었다. 어쩌면 내 생명에 은인일지도 모르겠다.

“야, 내가 너 한 목숨 살렸다? 나중에 꼭 갚아야 해.”


그는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고, 나는 그 싱그러운 웃음에 전염되어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 언젠가 한 번은 꼭 도와줄게.”


내가 아니라 행운이 도와줄 거지만 말이야. 행운이 나에게 속삭인 이유는 이 반장 때문일 거다. 이 녀석이랑 친해지란 소리겠지.


“근데, 칠운이 너도 이 시간에 등교하나 보네. 난 맨날 이 시간에 나오는데, 왜 못 봤지?”


나는 종종 봤다. 때로는 뒤에서, 또는 옆에서. 그때마다 반장은 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나를 못 봤을 거다.


“그러게, 나도 매번 비슷한 시간에 등교하는데 말이야. 여하튼, 반장, 종종 같이 등교하면 되겠네.”


“야, 반장이 아니라, 임채우다. 배우. 그렇게 불러, 인마. 맨날 반장이래.”


나는 피식 웃으면서 따라 대답했다.


“네, 임채우 반장님.”


잘생기고 인기 많은 우리 반장님은 주변 사람들을 어색하지 않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언제나 중심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주변 사람을 늘 대화에 끼게 만들기 때문에 중심이 되는 걸까. 참 신기한 녀석이다. 채우와 대화하면서 등교를 하니, 주변에 점점 사람이 늘어갔다. 조금 걸어가면 뒤에서, 혹은 옆에서 인사하며 친구들이 늘어났다. 피리 부는 소년도 아니고 말이야.


때로는 예쁜 여학생, 때로는 덩치 좋은 남학생, 때로는 선배, 때로는 후배까지. 이리저리 봐도 발이 참 넓었다. 신기하게도 채우는 그들과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하고, 농담을 하면서 학교까지 왔다. 나랑 모르는 사람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참 신기했다. 물론, 대부분의 화제는 채우에게 나왔다. 이번에 학생회에선 체육 대회 때 조금 특이한 이벤트를 진행할 거라는 둥, 말 많기로 유명한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최대한 짧게 줄이는 게 최우선 과제라는 둥, 재밌는 이야기를 해대면서 말이다.


학교에 도착해서 생각을 했다. 채우는 어째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까. 지루한 조회 시간에도 그는 담임 선생님에게 웃으며 인사를 했고, 농담을 던지면서 친구들과 웃고 있었다.


종종 잘생기거나 예쁜 친구들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그들은 자신이 잘생기고 예쁘다는 걸 알고 있을까. 흔히 주변 사람들이 하는 칭찬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외모가 남들보다 눈에 띈다는 걸 인식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 외모를 즐기고, 이용하려고 할까. 아니면 그냥 신경 쓰지 않고 있을까. 궁금하지만, 물어보기 애매한 질문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꼭 물어봐야지.


툭.


멍하니 있는 사이, 조회 시간이 끝났다. 맨 앞에서 담임 선생님과 이야기하던 채우는 어느새 내 옆에서 내 어깨를 감싸 쥐고 있었다.


“야, 이번에도 야자 튀면 뒤진대. 오늘은 좀 남아서 공부해라. 너 때문에 나까지 혼날뻔했다니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신기하게도 행운은 늘 작용하면서 나를 공부하는 방향으로 이끌려고 애를 쓴다. 진정으로 나를 위해서 그런 걸까. 내가 그런다고 공부를 할 것 같을까?


“오늘은 담임 선생님이 일이 있어서 일찍 들어간대. 대신 영쌤이 야자 봐주신다던데.”


“아, 어쩐지 오늘 영어 공부가 하고 싶더라. 하하.”


신다영 영어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것 같다. 외모도 외모지만, 성격 때문에 더 그랬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게 가장 좋다면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정확히 나눠서 하신다. 우리도 해야 하는 일만 하면 딱히 터치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그녀를 믿고 따른다. 학생들은 편하게 그녀를 찾아가서 상담을 받고, 대화를 나눈다. 영쌤 말로는, 영어 선생을 안 했으면 카운슬러가 되었을 거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오늘은 마침 영어 수업도 들었다. 하루에 2번이나 마주친다니. 복 받은 날이다.

학교에 들어서서 수업이 시작하는 종이 울리면 시간은 정말 미친 듯이 빠르게 지나간다. 수업 시간에 내가 하는 거라곤,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거다. 그렇다고 모범생은 아니다. 오히려 잠만 안자는 편에 가깝다. 선생님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해야 할까. 대놓고 자면 너무 미안하니까 수업은 열심히 듣는 편이다.


왜 모범생이 아니냐면, 필기를 하거나 열정적으로 참여하진 않기 때문이다. 풀어보라고 시킨 문제는 풀지만, 외우라고 하는 부분에 밑줄은 쳐놓지만, 그 이상 하지는 않는다. 힐끗 옆을 보니, 알록달록한 색상의 형광펜이 현란하게 교과서를 수놓고 있었다.


“왜? 오늘도 필통 안 들고 왔어?”


내가 아무리 귀찮음이 많아도 필통을 안 들고 다니진 않는다. 가방을 착각해서 잘못 들고 올 순 있지만. 어제 펜 좀 빌렸다고 너무 까칠하다. 남녀 공학인 고등학교에서 2학년이 되니, 같은 학교에서 사귀는 친구들이 꽤 많아졌고, 커플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남녀가 책상을 붙여서 앉게 됐다. 내 옆에는 그래서 여학생이 앉아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만, 잘하지는 않아 보이는 친구였다.


“아냐, 오늘은 잘 들고 왔어.”


“근데, 왜 이렇게 깨끗하게 써?”


“후배들 물려주려고.”


또 헛소리 한다는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교과서로 돌리면서 수업에 집중한다. 가슴팍에 달려있는 노란 명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천지선’. 이름이 천지선이었구나. 처음 알았네. 선이 ‘착할 선’은 아니겠지. 나중에 물어봐야지. 웅얼거리는 듯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살짝 주위를 둘러보니 꾸벅꾸벅 조는 친구들이 많이 보였다. 역시, 푸린 선생님 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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