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by 글도둑

하늘에서 무엇인가 떨어질 때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느껴본 적 있는가. 나는 새하얀 공간에서 홀로 그 느낌을 만끽한다. 깔려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더 듣고 싶다는 설렘이 하얀 오선지 위를 까마귀처럼 맴돌고 있다.

언제나처럼 꿈이 시작된다. 존재하는 하얀 공간에서 갑작스레 내 머리 위로 검은 피아노 한 대가 떨어진다. 나는 슬쩍 발을 들어서 옆으로 움직여 피한다. 묵직해 보이는 피아노는 나를 스치고 떨어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피아노의 덮개가 열리더니 새하얀 건반과 검은건반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제 시작이다.


내 발밑으로 검은 줄이 뻗어져 나간다. 내 위와 아래로 뻗은 검은 줄이 낮은 담벼락이 되어 내 움직임을 방해한다. 이 검은 담벼락 사이를 오가면서 머리 위에 떨어지는 커다란 돌덩이를 피해야 한다. 음표처럼 생긴 돌덩이는 늘 내 머리 위에서 떨어진다. 그리고 낮은 담벼락을 때려 부수며 움직이면서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이 미친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옆집에 이사 온 사람이 클래식을 틀어놓고 자면서부터다. 그 사람은 늘 자기 전에 클래식을 틀어놨다. 매일 다른 음악 소리가 들렸고 나는 희미하게 들리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잠에 빠졌다. 빠졌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 뒤로 이런 이상한 꿈속을 헤매고 있으니까. 우습게도 나는 이 꿈을 즐기고 있다. 어릴 적 했던 음악 게임과 비슷해서 재밌다는 점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스릴 넘치는 꿈이랄까.

지난번에는 굉장히 어려운 곡이었다. 일정하지만 빠른 리듬으로 한쪽에서 돌덩이가 쏟아져내리며 다른 한쪽에서 더 빠른 리듬으로 돌덩이가 덮쳐왔다. 숲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음표 속에서 공포스러운 무언가가 나를 쫓아오는 느낌이었다. 규칙적이면서 빠르게 떨어지는 돌덩이에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뒤에 따라오는 음산한 느낌의 돌덩이는 순식간에 나를 현실로 내동댕이 쳤었다.


이번 곡은 조금 달랐다. 그때는 어둡고 음산하면서 축축한 느낌이라면 이번에는 깨끗하고 깔끔하면서 밝은 느낌이었다. 부드러우면서 밝은 피아노 소리가 퍼졌다. 머리 위에 큰 음표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속도도 한참 느렸다. 입에서 피 맛이 날 정도로 달렸던 지난번과 다르게 가벼운 뜀박질로도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갑자기 빨라지거나 쾅하는 소리를 내는 변칙적인 곡도 있었기에 방심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느긋하게 떨어지는 돌덩이를 지켜보면서 귓가를 맴도는 피아노 소리에 귀가 집중된다. 칠흑처럼 검고 묵직한 돌덩이가 떨어질 때마다 ‘따, 단’이라는 가볍고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피하고 또 피했다. 그러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 노래는 너무나도 안정된 느낌이었다. 지나치게 안정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돌덩이 사이사이 뭔가 비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돌덩이와 다음 돌덩이 사이에 잠깐의 공백이 있다. 그 공백이 너무나 인위적이랄까. 겉보기엔 멀쩡하고 차분해 보이나 사실은 감정이 거세된 사이코패스처럼 느껴진다. 내 머리 위에 돌덩이가 떨어져 내리기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살짝 긴장된 나의 몸과 약간의 공포심을 머금은 뇌에서 그런 착각을 유도하는 건가.


그러나 위에서 떨어지는 돌덩이는 여지없이 같은 속도로 내려온다. 섬뜩한 생각을 멈추고 서둘러 몸을 움직여 피한다. 위협적이지 않게 느껴진다. 오히려 저 돌덩이가 사실은 스펀지처럼 가볍고 푹신해서 내 머리 위에 떨어지더라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서늘한 착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옆에 있던 돌덩이가 왼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왼팔이 지우개로 지운 듯, 하얀 공백이 생겼다. 아프진 않지만 짜증이 솟구쳤다. 이 꿈은 늘 이런 식이다. 나의 몸을 지워가면서 하얀 공백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번에도 네가 졌다고 놀리는 듯한 기분이다. 고통은 없어도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오른쪽으로 치우친 상태에서는 빠르게 뛰다가 종종 넘어진다. 한쪽만 남은 손으로 뺨을 두들기며 다시 돌덩이를 기다렸다. 리듬감을 가지고 피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음악이 가져오는 상념을 떨져 내며 뛰어야 한다. 음악 속에 빠져들면 어느새 돌덩이는 내 머리를 지워버리니까.


따, 단하는 소리에 맞춰 발을 옮긴다. 미끄러지는 돌덩이를 피하고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새하얀 공간을 검게 채워나간다. 이번엔 반드시 이기겠다고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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