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m
영화 매트릭스의 종반부 어느 장면에서 매트릭스 세상의 구원자 네오는 드디어 각성을 하게 됩니다. 그를 집요하게 쫓으며 네오를 위협하던 요원들을 포함해 가상 세계 내의 사물과 풍경은 갑자기 0과 1, 각종 수치화된 초록 텍스트로 보이며 네오에게 간파되고 날아오는 총알조차 멈춰버리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감독이 던지는 대표적 메시지는 ‘우리가 알고 체험하고 있는 세상이 과연 진짜 세상일까?’라는 문장으로 대변되는데, 저는 이 장면에서 그 의문보다는 현실세계가 디지털화되어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것과 자연스레 모든 대상을 수치로 환원하여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게 된 우리의 생활양식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진화를 통해 형성된 인간의 뇌와 인지능력에 대한 가설이나 이론은 차치하고, 단순히 데이터의 관점에서 보면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무한의 상태 값 중 사잇값의 무시 또는 분절화된 값으로 외부 세상(아날로그)을 쪼개서 바라보거나 지시하는 것을 ‘디지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날씨의 ‘춥다 덥다’를 수온주에 표시되는 기온 수치로 이해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개념을 정립하여 형태는 ‘아날로그’지만 디지털의 원리로 발명된 시계를 통해 개념을 현실화하는 등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수치의 샘플링(표본화, Sampling)을 통해 진짜 세상과 사물과 현상의 일부를 정보로 만들어 취득하는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외부 세상을 디지털화하는 것은 효율성의 측면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외부의 모든 정보를 인간은 다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눈을 통해 바라보는 시야 내의 풍경은 아날로그이지만 이것을 국한하여 바라보고 읽고 받아들여야만 가치를 가지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디지털화 자체가 가치부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디지털의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는 것은 무한의 정보를 단순화하는 것이며, 공통점과 차이점으로 분별하여 정리함으로써 지식을 만들고 축적하는 최소 단위의 과정입니다. 공학도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에도 참 엄청난 개념의 발명입니다. 전기전자 회로에서 전자기의 아날로그 물리량인 전압을 통해 5 볼트 근처를 1(있음), 5 볼트보다 현저히 작은 볼트 또는 반대방향의 벡터 값을 0(없음)이라 정의하고 이 것을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게끔 만들었기 때문에 이 개념의 토대 위에서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IC 집적회로, 컴퓨터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디지털화된 인식의 효율성의 이면에는 버려지거나 뭉개지는 식으로 배제되는 아날로그 값이 존재하는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디지털화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접하는 정보와 수치는 의도적이었든 아니었든 태생적으로 왜곡과 오류를 내포한 채로 나에게 오게 된 것임을 염두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효율성만 추구하고 살 수 없으며 정보의 홍수라고 일컬어지는 현대사회에서는 그 어느 시대보다 가공된 값, 분절화된 수치가 범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