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못 그리는 고야

위건

by 글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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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참 못 그린다!’ 고야의 그림을 볼 때면 항상 드는 생각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하나에게 감히 못 그린다니요.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못 그린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고야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옷을 입고 있는 마야 부인’, ‘옷을 벗고 있는 마야 부인’을 봐도 영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자세부터 이상합니다. 분명 침에 누워 있는데 무언가에 기대 있는 듯한 느낌도 나고, 침대에 누운 게 아닌 살짝 떠 있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머리에 두르고 있는 손과 팔도 부자연스럽습니다. 오히려 한 세대 전의 들라크루아나 앵그르, 다비드 등의 그림이 훨씬 자연스러워 보일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야의 그림은 후대 화가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고, 그의 작품은 마네부터 피카소, 중국 국민화 가라 불리는 웨민준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화가들에 의해 재창조되고 있습니다. 이 거장들은 과연 고야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을까요? 매료된 포인트들은 화가들마다 다 다르겠지만, 고야의 그림에 강한 울림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울림은 보편적인 감정의 떨림에서 나옵니다. 고야는 떨림의 순간을 누구보다 잘 포착하였습니다. 결코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절망의 순간. 그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고야만의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어디 도망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의 절망감. 이런 절망의 순간을 맞이하였을 때 드는 오만가지의 생각과 자책의 감정들. 그리고 물 밀듯이 밀려오는 후회의 감정. 이 순간을 누구보다 잘 표현한 화가가 고야입니다.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사투르누스)를 보면 그림 자체는 다소 불편함이 있습니다. 전체적인 신체는 다소 기형적으로 길게 표현되어 있고 붓질은 거칠기 짝이 없습니다. 손에 들고 있는 시체는 너무 뻣뻣해서 마치 인형 같고, 그리다 만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거침은 희번덕한 두 눈 앞에서 양순해집니다. 이 작품에서는 그 두 눈이 모든 것을 다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절망과 후회로 가득 찬 감정을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쏟아내고 있습니다. 제목에 등장하는 크로노스가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을 만큼 이미 그 자체로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신들의 신이라 불리는 제우스의 아버지입니다. 크로노스는 태초의 신인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에서 태어난 티탄 12 신 중 막내입니다. 그는 아버지인 우라노스를 거대한 낫으로 거세하고 신들의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런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크로노스를 두렵게 하는 일이 발생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신탁입니다. 너의 자식들 중 하나가 저의 자리를 뺐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듣게 되고, 크로노스는 자신의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잡아먹습니다. 12명의 아이 중 마지막 제우스만이 살아남고 크로노스와 전쟁을 벌여 이기게 됩니다.


고야는 바로 이 장면을 그렸습니다. 워낙 극적이고 유명한 장면이기 때문에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린 장면이지만 고야의 작품이 군계일학입니다. 크로노스가 자식을 잡아먹는 그 순간. 내가 왜 이들을 먹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와 회한. 후회하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계속 먹어야 하는 운명에 대한 절규, 그 속에서의 광기를 이 그림에 압축해내었습니다. 그런데 더 절망적인 것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올림푸스 신전들은 탈출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감옥에 가깝습니다. 그는 신전의 정점에 서 있고자 자기의 자식들을 잡아먹고 있는 비극 속에 그 스스로를 밀어 넣고 있지요. 올림푸스 그 자체가 감옥인 셈입니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림 자체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크로노스만이 검은 벽면 한가운데 그려져 있을 뿐입니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습니다. 너의 운명은 네가 결정지어야 한다고 말하듯이, 외부의 손길이나 탈출구 따위는 일절 표현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절절한 절망감. 나 혼자 이 끔찍한 끝도 없는 무저갱을 헤쳐 나아가야 한다는 절망스러운 현실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다른 고야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페인에서의 대학살을 그린 ‘1808년 5월 8일’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프랑스군의 총구 앞에 두 팔을 높이 들고 서 있는 사람만 있을 뿐 어디도 희망은 없습니다. 조명은 철저하게 죽음의 현장만을 비추고 있습니다. ‘정신병원의 앞마당’이라는 작품도 너무나 고야스럽습니다. 세상과 완전히 유리되고 갇혀있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각기 다른 절망과 고통 속에서 웅크리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격하게 몸싸움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채찍 든 사내들은 냉정하게 그들을 감시하고 있고 정신병원의 높다란 담은 그들을 완전히 격리시킵니다. 조명이라고는 오로지 저 하늘의 그것밖에 없습니다. 새가 되어 날아가지 않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을 그립니다. 각기 다른 제목과 주제들의 작품들이지만, 헤어날 수 없는 절망들을 표현합니다. 정말 그들에게 희망은 없는 것일까요?


작은 희망을 크로노스의 눈에서 발견했습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루벤스의 크로노스와는 다르게 고야의 크로노스에게는 자아가 있습니다. 슬픔과 고뇌와 번민과 후회가 느껴집니다. 그림 안에서는 그 누구도 그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응시합니다. 살려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묵묵하게 지켜볼 수밖에요. 결국 그 굴레를 벗어나는 건 크로노스 자신의 몫입니다. 하지만 그 절박함을 느낀다는 건 자체가 희망입니다. 작은 감정적 떨림은 한가닥의 희망을 갖게 합니다. 나중에 크로노스는 제우스를 삼키지 못하고 제우스를 대신한 돌을 삼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제우스에 의해 최후를 맞이합니다. 어쩌면 크로노스는 제우스와 바꿔치기한 돌을 알고도 모르는 척 삼키지 않았을까요? 돌을 삼키며 기쁜 눈망울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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