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언진담-계곡 1

by 글도둑

그는 신화 속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사실처럼 생생하게 풀어내며 인기를 얻었다. 그에게 관심이 갔던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나에게 더없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 안녕하세요! 스트리머 ‘허언’입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이 제일 궁금해하셨던 점! 바로 제가 왜 이렇게 오랫동안 살게 되었는지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많이 궁금하셨죠? 추측이 다양하던데. 막 어디 외계인에게 납치돼서 실험당하고 돌아온 게 아니냐는 설도 있고 힐링 팩터를 가진 돌연변이다 라는 설도 있더라고요. 하하, 그래서 제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머리카락은 왜 이모양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보약 잘못 먹은 게 아니라고요.


그는 인터넷에서 방송을 하고 있었다. 절반은 하얗고 절반은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길러서 상투처럼 묶고 있었다. 옆머리는 깔끔하게 밀었는데, 왼쪽 머리는 뿌리부터 하얀색이었다. 반대쪽 역시 뿌리부터 검은색이라 사람들이 콘셉트 맞추려고 매일매일 염색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얼굴에는 입만 보이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새하얀 가면에 붉은색 연지곤지. 각시탈이다. 꽤나 오래된 가면인 듯 꼬질꼬질 손때가 묻어있었다.


- 그때는 아버지 따라서 산속으로 들어가 사냥을 하거나 나무를 패던 시절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겠지만, 나 때는 말이야, 다 산속에서 사냥하고 나무 자르고 그랬어. 응? 그때는 다 그랬어. 자, 그래서 그날도 평소처럼 아버지 따라서 산속으로 들어갔는데, 유난히 안개가 심한 날이었죠. 그 날만큼은 정말 생생히 기억나요. 왜냐면 기억이란 게 참 오묘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중요하지 않던 기억은 서서히 풍화돼서 먼지처럼 날아가지만, 중요하고 흥미로웠던 기억은 풍화되지 않고 남아서 마치 모래사막에 피라미드처럼 굳건하게 남거든요. 그 날이 바로 제겐 피라미드 같은 날이었죠. 맞아, 그래서 그 안개가 낀 날이라 더 조심조심 들어갔는데, 제가 그때 한 열네 살인가 그랬어요. 나 때는 말이야, 그 나이엔 밥벌이하고 그랬어. 허허, 요즘 젊은이들이란. 아, 알았어요. 꼰대 놀이 그만할게요.


그는 옆에 있던 텀블러를 들어서 물을 마시고 다시 내려놨다. 텀블러에는 1912, 파이크 플레이스라고 적혀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던지 손 때가 꼬질꼬질했다. 그를 좋아하는 시청자들은 내가 보내준 텀블러는 왜 안 쓰냐며 좀 쓰라고 다그치곤 했다.


- 그 안개 낀 날에 아버지 뒤를 따라 걷는데 갑자기 발 밑이 쑥 하고 빠지더니 미끄러졌지 뭐예요. 그 산이 꽤 높았는데 아버지랑 맨날 올라가던 산 높이가 대충 1900m 정도? 근데 그 날은 안개 때문에 길을 잃어서 이상하게 오르막 길만 걸었거든요. 진짜 반나절을 그렇게 걷기만 했으니 자빠질만하지. 그래서 다시 일어났는데 아버지가 안 보이는 거야. 그때 덜컥 겁이 났었죠. 발목은 부어오르지, 아버지는 안보이지, 안개 때문에 길도 못 찾겠지. 아버지가 평소에 하던 말이 산에서 길 잃으면 물부터 찾으라고 그랬어요. 물줄기 따라서 내려가면 내려갈 수는 있다고. 그래서 일단 귀 기울이면서 물부터 찾아다녔어요. 어디 물소리 나는 곳 없나, 아니면 도끼 자국 난 나무 없나 하면서. 보통 산에 나무하러 가면 아버지가 지게랑 보따리랑 해서 들고 저는 도끼 하나 딱 들고 갔거든요. 그래서 지나가던 길에 큰 나무 있으면 도끼로 자국 표시해서 가고 그랬어요. 그래서 도끼 자국 아니면 물 찾아다녔죠. 그렇게 한참을 걷는데 어디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거길 갔는데, 내 평생 그런 장관은 처음 봤어요. 아니, 웃긴 게 또 아버지랑 몇 년을 그 산에 나무하러 갔는데 그런 곳은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근데 그 날 갔던 그곳은 투명한 물이 담긴 계곡에, 멋들어진 폭포까지 있었어요. 일단 목표로 했던 물줄기도 찾았겠다, 안심하고 일단 목부터 축이려고 했어요. 계곡에 또 물이 깨끗하니 시원해 보이더라고요. 마시려고 도끼를 나무 옆에 기대 놓고 손으로 물을 살짝 뜨는데, 계곡물이 생각보다 깊었어요. 내 기억으론 무슨 석촌 호수 절반쯤 되는 크기였을 거야, 아마. 아니, 내 기억이 그렇다는데, 왜요! 아, 하여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손을 딱 넣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손을 딱 넣으려고 하는데 눈이 마주쳤어요.


거기 안에 엄청 큰 뱀이 한 마리 있었거든요. 근데 그냥 뱀이 아니라 새하얀 뱀이었어요. 약간 신령스러운 느낌이 드는? 뱀 머리가 새하얀 뱀인데, 나는 맨 처음에 여기에 눈이 쌓여있는 게 비쳐서 하얀색이 보이나 싶었죠. 그래서 뒤로 엉덩 방이 찧고 막 발이랑 손이랑 집어서 뒤로 내빼는데, 막상 뱀은 슬쩍 보더니 그냥 가만히 있더라고요. 눈 딱 감고. 심장이 막 쿵쾅거리는데 오들 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다시 일어서니까 그때 옆에 안개 때문에 안보이던 큰 바위가 하나 보이더라고요. 그 바위가 신기하게 평상처럼 평평하게 생겼어요. 근데 거기에 바둑판이랑 반상이랑 딱 차려있더라고요. 방금까지 누가 있었던 것처럼 음식도 있고 술도 있고. 심지어 술잔에는 술이 절반 정도 차 있었어요. 바둑판을 보니까 흑돌이 백 돌에게 포위되어 있더라고. 그때는 바둑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누가 이겼는지도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백을 쥔 사람이 다 이겨놓고 있었네. 여하튼 그래서 바둑 두던 사람들 어디 갔나 하고 둘러보는데 아무도 없는 거 있죠?


근데 내가 말했잖아요. 하루 종일 걸었다고. 그냥 걸었나? 아주 높은 산을 기어올라왔지. 그래서 그런지 위장이 막 요동을 치는 거야, 근데 또 반상에는 복숭아처럼 생긴 과일이 예쁘게 잘려있었는데 그게 또 너무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거 있죠? 그래서 이걸 주워 먹어도 되나, 그래도 임자가 있는 물건인데 손대면 안 되겠지. 이 생각이 막 머리에서 싸워. 그래서 막 고민하면서 주머니를 탈탈 털어보니까 먼지 밖에 안 나와. 그래서 어쩔 수 없다. 그냥 가자 해서 뒤를 딱 돌아서 도끼가 있던 나무로 걸어가는데, 계곡 물에서 뭔가 튀어나오는 소리가 촤악 하고 들리는 거야. 나는 뱀이 나왔구나 해서 뒤도 못 돌아보고 뛰려는데 아니, 사람 목소리가 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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