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느냐? 저 복숭아가 탐나지 않는구나?”
허언은 평소 목소리가 아니라 아주 낮고 저음의 목소리를 깔더니 뱀으로 추정되는 사내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재밌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로 혼자 그럴듯한 상황극을 만들어낸다는 거였다. 덕분에 듣는 내내 구전동화처럼 재밌게 듣는 사람이 많았다. 정말 있었던 일 같아서.
“저는 그저 구경만 했을 뿐입니다.”
- 그렇게 말하면서 제가 슬쩍 뒤를 돌아봤거든요? 그런 단어 알아요? 선풍도골? 딱 봐도 아 나 신선입니다 하게 생긴 사람 있어요. 아니 무협지도 안 봤어요? 다들 그 나이 먹고 뭐했....아 아닙니다, 그럼요. 우리 시청자분들 다들 공부하고 제가 방송하는 거 보고 그러느라 바쁘셨죠? 그렇죠? 그래요 무협지 그런 거 보지 마요. 하하. 크흠. 어쨌든 그분이 뽀얗고 새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서 있는데, 아 이게 신선이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도망칠 생각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있었죠. 근데 그 신선처럼 보이는 할배가, 아 그냥 신선이라고 할게요. 신선이 다가오더니 은근한 말투로 말하는 거 있죠?
“이보게나, 배가 고파보이는데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저 복숭아를 주겠네. 어떤가? 그리 어렵지도 않아.”
- 목소리만 딱 들어도 왠지 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들지 않아요? 내가 따라 하는데도 참 목소리 멋지죠? 그쵸? 여성 시청자분들 이런 남자 친구 만나면 전화할 때 진짜 설레요. 이런 남자 만나세요. 목소리가 아주.....아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냐고요?
“아, 예, 신선님.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해야지요. 암암,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깝쇼?”
- 그랬더니 나를 살살 이끌고 바위로 가는 거야. 그러더니 반상에 있는 흑돌 하나를 쥐어주대?
“자, 이걸 반상 아무 곳이나 비어있는 곳에 두거라. 그럼 된단다.”
- 그래서 나는 덥석 쥐고 빈칸 안에 넣었지. 아니 왜 이렇게 웃어. 내가 말했잖아. 바둑이 뭔지도 몰랐다고. 그거 신선놀음이네 뭐네 하지만 양반들이나 하던 거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걸? 내가 그렇게 돌을 두니까 신선 할배가 껄껄껄 웃더니 돌을 선과 선이 교차하는 점에 두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옆으로 슬쩍 밀어서 맞췄지. 그때는 신선 할배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냥 시키는 대로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 같아. 내 추측인데 바둑을 두던 신선들이 내기를 했는데 지기 싫어서 흑돌 두던 신선이 패배를 시인 안 하고 도망친 거지. 그래서 날 데려다가 바둑을 끝낸 게 아닌가 싶어. 내가 한수 두니까 할배도 한수 두더라고. 그러더니 막 흑돌을 주워 담는 거야. 그러더니 주워 담은 흑돌을 뭉치더니 갑자기 영롱하고 반짝이는 큰 구슬이 되지 뭐야. 그걸 소매로 쏙 감추더니 복숭아를 들어서 나에게 줬어.
“고맙네. 자, 이걸 먹게나. 천상의 맛이 무엇인지 알게 될 걸세.”
- 그러더니 휘적휘적 계곡 속으로 들어가시는 거 있지? 그렇게 복숭아가 내 손에 들어왔어. 아주 탐스러웠지. 딱 한주먹 정도의 크기였는데 말이야.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텀블러를 멍하니 바라봤다. 텀블러가 아니라 저 먼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1초 아니 2초가 넘어갈 정도로 멍하니 텀블러를 보던 그의 입가에 침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 츄릅, 아 그거 진짜 맛있었는데. 이게 극락이구나 싶었어. 그 주먹만 한 복숭아를 한입에 다 넣었다니까. 과즙이 터지면서 입안을 적시는데 입에서 튀어나오는 조각들도 다시 잡아서 입에 털어 넣었을 정도로 맛있었어. 그걸 꿀꺽 삼키고 숨을 후 하고 뱉는데 달짝지근한 향이 나더라. 그걸 먹고 눈을 딱 뜨니까 주변이 다시 보였어. 안개 속도 훤히 보이더군. 근데 신기하게도 바위도, 반상도, 흑돌과 백 돌도 사라지고 없었어. 심지어 계곡도 없더라구. 내 옆에는 졸졸졸 흐르는 아주 작은 물줄기 하나랑 그 옆에 반쯤 썩어버린 도낏자루와 녹이 잔뜩 슬어서 붙어있는 도끼날 밖에 없었어.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안개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더라. 나는 아버지에게 뒤졌다, 지읒 됐다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도끼를 들었지. 도낏자루가 썩어서 그런지 도끼날이 툭 떨어지더라고. 근데 떨어지는 도끼날 밑에 까마귀가 한 마리 있지 뭐야. 웃긴 건 까마귀는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어. 까마귀는 덩치가 꽤 컸는데 거의 내 팔뚝만큼 컸어. 눈이 아주 새빨간 색이라서 흠칫하고 물러서는 찰나, 도끼날이 까마귀의 머리로 떨어졌지 뭐야.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까마귀는 도끼날에 머리가 박혔어. 녹이 잔뜩 슬었는데 무거워서 그런지 아니면 까마귀 두개골이 연약했는지 몰라도 잘 박혔더라. 눈을 마주치고 뭔가 불길했는데 차라리 잘됐다 싶었지.
- 도끼 망가트린 걸 알면 아버지가 날 반쯤 죽일 텐데, 도끼 날도 없다면 아예 죽일 것 같아서 도끼 날을 뽑으려고 까마귀 다리를 잡는데 다리가 3개인 거야. 깜짝 놀랐지. 까마귀가 수컷 아니냐고? 아니 인마 발가락도 달려있었다고! 발가락! 여기서 그런 드립 치면 큰일 나 인마! 떽! 나야 종종 다리가 세 개라고 목욕탕 가면 다들 놀라고 그랬... 큼큼. 그래, 어쨌든 까마귀의 중간 다리를 잡고 도끼 날을 뽑아서 다시 도끼 자루가 맞추려고 끙끙 대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라. 그러더니 비구름이 막 몰려와. 갑자기 날이 흐려져서 비가 올까 봐 부리나케 물줄기 따라서 뛰었지. 아래로 아래로 뛰는데 하늘에서 번쩍 하는 거 있지? 그래서 올려다봤지. 궁금하잖아. 아니 그렇잖아. 내가 이상한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궁금한 게 좀 많아. 딱 올려다보닌데 구름 사이로 새하얀 비늘을 가진 길고 긴 뭔가가 하늘 속을 꿈틀꿈틀 움직이는 거야. 구름을 타고 이리저리 노니면서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지.
- 나는 아직도 기억나. 새하얀 비늘, 검은 먹구름과 새하얀 천둥 번개 사이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하늘을 맴도는 그 장면이. 나는 멍하니 비를 맞으면서 그걸 지켜봤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무언가가 하늘에서 사라질 무렵 구름이 사라지고 햇살이 쫙 내려앉더라. 황홀한 광경이었지. 그렇게 다시 물줄기를 따라서 걷고 또 걷는데 아버지가 저 멀리 보이는 거야. 아버지가 새 걸로 보이는 도끼로 나무를 하고 있더라. 나는 아버지에게 뛰어갔는데 아버지는 멍하니 나를 보더니 “허언, 허언이 맞네?‘ 하면서 나를 잘 몰라보더라고. 아버지가 너무 반가워서 끌어안는데 어느새 내가 아버지보다 덩치가 커졌더라고. 근데 아버지가 머리카락 색이 이상하다며 나 맞냐고 자꾸 물어보시더라. 나 허언 맞다고 왜 아들도 몰라보냐고 짜증 내니까 집에 가는 길에 있는 우물에 비춰보래. 그래서 집 가면서 비춰보니까 머리카락이 절반만 새하얗게 변했더라고. 심지어 아버지랑 나무하러 갔다가 사라진 지 세 번의 여름과 세 번의 겨울이 지나 네 번째 봄이었다고 하시더라. 그때부터 더 이상 안 늙더라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말이야.
그는 텀블러를 들어서 바닥이 보일 때까지 꿀꺽거렸다. 텀블러를 책상에 탕 하고 올려놓더니 크다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말을 이어갔다.
- 자,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때를 기점으로 제가 안 늙었어요. 시기상을 따져보면 이때 이 사건밖에 없어요. 그 전에는 별 사건도 없었고 평범했거든요. 실제로 육체적으로 뭔가 변화를 느끼기도 했고. 그 복숭아가 뭔가 특별한 게 아니었나 싶네요. 자, 오늘은 이야기가 좀 짧네요. 하하. 여하튼 오늘도 와서 제 이상한 헛소리 들어주셔서 감사하고요. 늘 말씀드리지만, 제 이야기를 믿거나 말거나 재밌으면 그만입니다. 좋은 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