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자의 여유

만기 교사의 비애 <셰익스피어,리어왕>, <프란츠 카프카,변신>

by 박한희
KakaoTalk_20260303_085349563_01.jpg 어느 뜨거운 여름, 논산 관촉사 들어가는 길



만기 교사는 묘하게 우울하면서도 행복하며, 두렵다.

학교라는 조직에서 '만기(滿期)'란 확정된 이별을 의미한다. 이미 ’떠남‘이 확정된 사람. 내년이면 이곳에 존재하지 않을 사람.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학교의 내년 업무분장에서 깨끗이 지워진다. 동료들이 모여 내년도 업무분장을 얘기하고, 교감 선생님의 일대일 호출을 받으며 '중요 부장직'이나 '기피 업무'를 두고 밀당을 벌이는 시장통 속에서, 나는 철저히 배제되는 기쁨과 공허함 속에서 잠시 이 학교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다. 참 야속하면서도 행복하다.


누군가 그랬었다.

직장에서 오늘 하루 정말 원하고 행복한 날은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날, 메시지나 전화가 오지 않는 날‘이라고 말이다. 확실히 그렇다.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질 불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홀가분하지만 그 이면에는 묘한 공허함과 외로움이 발생한다. 어제까지 ’중요 부장‘을 맡았던 내가 이제 이 학교에서 주변인으로 전락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기묘함’ 속에서 나는 문득 고전 속의 인물들을 떠올린다.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리어왕'이나, 어느 날 아침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가 된 기분이 이것일까.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는 가족을 부양하는 '쓸모 있는' 존재일 때만 인간 대접을 받았다. 쓸모를 잃고 벌레가 된 순간, 그는 가족과 사회에 경멸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학교라는 조직이 내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여할 '쓸모'가 사라진 나는 잠시나마 조직의 '벌레'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물론 나를 보고 비명을 지르거나 빗자루로 내쫓아 다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선생님은 좋겠어요, 내년 걱정 없어서"라는 부러움 섞인 말을 하지만, 그 친절한 배제는 날카로운 가시가 될 수도 있음이다.

내년 업무 폭탄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곧 떠날 나의 여유는 순간 사치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쓸모없음'이 주는 자유는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만기 교사는 참 모순적이다.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로 대우받으며 소외를 즐기지만, 동시에 발령받을 새 학교에서 맞닥뜨릴 '비장한 업무'에 대한 공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곳에서 다시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혹독한 대가를 알기에, 지금 이 구석 자리에서의 한가로움은 참 시리도록 달콤하다. 갓 들어온 신규 교사든, 20년을 훌쩍 넘긴 경력자이든, 곧 떠남을 앞둔 모든 교사는 이 찰나의 '벌레 시절'을 통과한다. 나는 오늘도 시끌벅적한 교무실 한구석에서, 가장 화려하게 배제된 채 서글픈 자유를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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