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식이 희소식

<일상 속의 인문학 한모금 3: 경청의 무게>

by 박한희
고창읍성


타인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 그것은 생각보다 정말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항상 이쯤되면 전화가 올텐데, 하면 여지없이 전화가 울려대던 한 친구의 연락이 있었다.

난 평소 무던한 성격이고 듣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일주일에도 1~2번은 기본, 그 친구는 나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전화기 너머에는 늘 해결되지 않는 심각한 고통과 근심이 존재했다. 대학 시절 누구보다도 인기가 많고 발랄했던 그녀는 삶의 풍파를 겪으면서 너무나 나약해지고 고개가 푹 숙여진 채 자존심을 잃은 상태였다.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마치 밀린 집안일을 해치우듯, 또는 심지어 아이 하원을 시키기 전 주차장의 차 안에서도 틈틈이 친구의 얘기를 항상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비슷했고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모양이었다. 정작 내가 그 사건의 당사자가 되었다면 똑같이 꼼짝도 못했겠구나 상상하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는 여러 고통을 겪으며 어쩌면 그 당시에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이 눈치 없는 나의 깨달음을 이제야 문득 반성해본다. 나는 정말 눈치없는 친구지만 얘기만큼은 잘 들어주어 그녀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나 보다.


처음에는 답답한 마음에 날 선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딱히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당장 이렇게 해봐!’라는 말은 친구를 위한 조언 같았지만, 사실은 나의 인내심의 한계를 가리려는 조급함이자 충고라는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신분석학자 칼 로저스가 강조했듯, 진정한 치유는 누군가 자신의 말을 비판 없이 수용해 줄 때 시작되는 것인데 말이다.


나는 결국 강한 해결책을 주는 '상담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그저 묵묵히 들어주는 일반인이 되기로 했다. 그녀가 쏟아내는 감정의 쓰레기를 묵묵히 받아내는 과정은 때로 영혼이 탈탈 털리는 고된 노동이었다.

어떤 날은 나도 사람인지라 지친 나머지 전화를 일부러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친구는 ’착한 바보‘였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바쁜데 전화해서 미안해”라며 고개를 숙이며 보내는 문자에 난 다시 고민을 1시간 넘게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내 편인 ‘네가 여전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며 안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대략 길게는 2년 정도가 흐른 듯 했다. 어느 순간부터 전화벨 소리가 뜸해지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열흘이 되고, 한 달이 두 달이 되었다. 친구의 문제가 점점 해결되고 있다는 뜻이였으며, 이제는 더 이상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다.


내가 쏟았던 2년의 경청은 어쩌면 친구를 향한 가장 긴 기도였을지 모른다.

그녀의 침묵은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이렇게 침묵이 반가울 줄이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가끔은 궁금하기도 하고 더 이상 나를 자주 찾지 않는 친구가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든, 누구보다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의 긴 통화가 끝났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희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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