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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영어 배우기

무교가 필리핀 크리스천 대안학교에서 공부한 이야기

by 반쯤 사이공니즈

베트남에서 영어를 배우려면

영어국제학교를 다니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하지만 주재원이 아닌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학비였고, 입학시험도 기본적인 영어 실력이 되어야 치러 볼 엄두를 낼 수 있었다. 오빠는 한국에서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워서 영어를 곧잘 했지만, 알파벳만 간신히 알던 중2의 나는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근데 내가

국제학교도 가지 않고

영어를 어떻게 배웠을까?

베트남에 오자마자 엄마, 오빠와 나는 3명이서 호치민 인사대 어학당으로 베트남어를 배우러 다녔다. 같은 반에서 만난 필리핀 영어 선생님과 거기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분은 한국에서 잠깐 살았다며 서툰 한국어를 하며 친근하게 다가오셨다. 선생님은 선교사 같은 활동을 하는 목사셨는데, 아내분도 영어를 가르치는 영어 선생님이셨다. 그렇게 우리는 선생님 부부에게 영어과외 수업을 받으며 영어를 조금씩 배웠고, 선생님 부부는 우리 가족과 같이 밥도 먹고 서로를 집으로 초대하며 친하게 지냈다.


오빠와 내가 고입, 대입 검정고시를 다 패스하고 나서 학업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필리핀 선생님이 제안을 하셨다. 기독교 대안학교를 작게 시작하려고 하니 우리를 믿고 보내주라는 설득을 하셨다, 미국에서 시작된 크리스천 대안학교와 홈스쿨링을 위한 커리큘럼인 A.C.E (Accelerated Christian Education)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대안학교를 시작하려고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때의 나는 '대안학교'라는 단어조차 생소하게 느꼈다. 또한 우리 가족은 무교였다. 따지고 보면 외가와 친가 쪽이 모두 천주교가 많았기에 기독교와는 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것을 떠나서 종교적인 강제성을 띄진 않을지 걱정을 많이 하셨다. 하지만 오랜 기간 알고 지냈던 선생님 부부에게 종교적인 강요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우리는 그 학교에 다니기로 결정했다.


3층 정도 되는 선생님 부부의 주택에서 시작된 작은 대안학교는, 선생님 부부의 필리핀 지인들의 자녀들 5-6명을 포함해 우리까지 총 8명 정도의 학생들뿐이었다. 교복도 없었다. 그저 단정한 와이셔츠와 치마를 입고 오라고 했다.


A.C.E 커리큘럼?

커리큘럼은 꽤나 흥미로웠는데, 대안학교와 홈스쿨링을 위한 커리큘럼인 만큼 각자 자발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형태였다. Office라고 부르는 도서관 같은 양옆에 칸막이가 높게 달린 개별 책상에 앉아서 자신의 레벨에 맞는 학습지를 스스로 공부하면 됐다. 본인이 원하는 만큼 노력하는 만큼 빠르게 진도를 나갈 수 있었고, 학습지 과정은 유치원 수준부터 고등학교까지 있었다. 영어를 못 해서 초등학생과 비슷한 수준의 레벨로 시작하게 된 나는 이 악물고 빠른 속도로 학습지를 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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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선 선생님을 Supervisor라고 불렀다. 채점을 하러 가야 하거나 간단한 테스트를 할 때는 깃발(국기)을 책상 위에 올려두면 Supervíor가 와서 묻는다. "Yes, Miss. What can I help you?" 그럼 아주 예의 바르게 "May I..."로 시작해서 원하는 바를 말해야 했다.


나에게 영어를 배우기 아주 좋은 환경이었고, 학습지를 스스로 빠르게 풀어나가는 것에 큰 재미를 느꼈다. 힐링하라고 만든 동물의 숲에서 빚을 갚기 위해 게임에서도 열일하는 한국인들처럼 나도 오빠도 승부욕에 불타서 집에 와서도 학습지를 계속 풀었다.


하지만

뒤늦게 찾아보니, A.C.E 커리큘럼은 종교적인 철학으로 인해 다소 치우친 교육을 한다는 비판이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정말 교재에서 진화론은 거론하지 않고 창조론을 가르친다던지, 교재 첫 장에 나온 성경구절을 무조건 외워서 검사를 받아야만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배웠을 땐 10년 전쯤이니, 지금은 달라졌을 수 있다.)


애초에 우리도 크리스천 학교임을 알고 갔기에 성경구절을 외우거나, 아침 조회가 예배로 진행되는 것은 큰 불만은 없었다. 그리고 종교적인 메시지나 가르침보다는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목적에 더 집중했다.


하지만 공부방 같은 모습도 간신히 갖추었던 처음과 달리 더 큰 곳으로 이사를 하고, 학생도 한 두 명 늘 때 즈음에 종교적인 강요가 시작되었다.


서서히 권위적으로 변해가는 분위기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배려해서 기도를 많이 시키진 않았는데, 우리도 예외 없이 기도를 했야 했다. 하루를 시작할 때, 마무리할 때 그리고 밥을 먹기 전후 랜덤으로 정해지는 순서에 따라 소리 내어 기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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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에 대한 기준도 만들어서 강하게 관리하기 시작했는데, 흰 와이셔츠, 무릎 아래로 충분히 내려오는 치마와 발목까지 오는 흰 양말에 검은색 혹은 갈색 가죽구두를 신어야 했다. 베트남 로컬학교에서 입었던 초록색 교복이 그리워졌다.


그 당시 베트남에서 그런 긴 치마는 시장에 가도 찾기가 어려웠기에 엄마가 옷감을 사서 옷을 맞춰주셨다. 중학교 교복을 제대로 입어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날 위해 신경을 써주셨던거다. 셔츠는 세일러복 같은 카라가 있었고, 검은색으로 무늬가 없는 무릎을 가리는 길이의 치마였다. 그런데 치마가 무릎 아래로 충분히 내려오지 않는다며 복장에 대한 경고가 지속되었다.


그래서 나는 치맛 단을 최대한 늘리고 또 늘렸음에도 자로 길이를 재면서까지 몇 센티가 부족한지 검사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치마를 꼭 입어야 한다는 것도, 그 몇 센티를 강요당하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결국 여자 선생님은

나를 포함한 모든

여학생들을 복도에서

무릎을 꿇리고

손을 들게 했다.

그때 내 치마가 땅에 닿지 않는다는 이유로 복장불량인 학생은 공부를 할 수 없다고 나를 집에 돌려보냈다. 엄마가 촌스러운 치마를 부끄러워하는 사춘기 딸을 위해서 정성 들여 만들어준 옷이었다. 심지어 미니스커트를 만들어 입은 것도 아니고, 학교에서 정해진 교복을 분배한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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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사건은 부모님이 우리가 학교를 그만두는 결정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종교에서 오는 간극과 깊어져버린 감정의 골로 인하여 우리는 큰 갈등을 겪었고, 그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들은 좀 더 엄격하고 주체적인 학교를 위해 중심을 잡으려고 했던 거였을까? 어린 나이에 보지 못했던 그들의 입장이 있으리라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마지막이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지만 소심하던 나를 친절히 달래주고 칭찬해 주며 발음 하나하나를 바로 잡아주던 선생님과, 한 마디도 못 하던 나를 친절하게 대해준 필리핀 친구들에 대한 감사함은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열심히 한 결과로 한마디 못하던 내가 입이 트이게 되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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