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한 이야기
베트남에서 18년째 사는 나에게 늘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한국 친구가 많아요, 베트남 친구가 많아요?' 답은 '반반'이지만, 나의 베프는 베트남 친구다. 10대 끝자락에서부터 30대인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친구다.
나는 베트남 로컬학교, 작은 국제학교를 다녀서 학창 시절 또래 베트남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지금 나의 베프는 두 번째 학교, 로컬 국제학교에서 만났다. 오전에는 베트남어, 오후에는 영어로 수업하는 작은 국제학교였지만, 사실상 로컬 사립학교에 가까웠다. 외국인이라고는 나 외에 원래 알고 지내던 한국인 형제뿐이었다.
한국인 또래 여자 전학생이라니, 그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재밌는 인물의 등장이었을까. 여기저기 모든 학생들이 나를 보러 구경을 왔다. 그렇게 같은 반에서 만난 내 친구를 앞으로 애칭인 마흥이라고 부르겠다.
마흥이는 그 당시 반에서 가장 장난꾸러기이자 영어를 그나마 잘하는 여자애였다. 번역기도, 메신저도 없었을 시절 우리는 문자로 한땀한땀 서로에 대해서 알아갔다. 당시 나는 베트남어 보다 영어가 편했던지라, 간단한 장난이나 농담 외에는 영어로 소통했다. 물론 그 영어도 서로가 매우 서툴렀다.
곧이어 우리는 원숭이처럼 날뛰는 아이들로 학교에서 유명해졌으며, 마흥이는 아직도 내가 17살 때 생일 선물로 사준 비글 강아지 인형을 안고잔다. 부모님도 외우지 못하시는 나의 핸드폰 번호를 마흥이는 아직도 외운다.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마흥이네 먼 친척, 사촌들까지 나를 아신다. 스물 중반까지도 매해 설날마다 각자의 집을 들리며 부모님께 세뱃돈을 수금하던 철없는 짓도 같이 했다.
그런 우리의 몇 가지 에피소드를 풀어볼까 한다.
한국을 좋아했던 반 아이들이 같이 모여서 떡볶이를 해 먹자고 했다. 마흥이 집으로 모이기로 했고, 나는 한국인으로서 부담감과 책임감을 안고 엄마의 도움을 받아서 5인분의 떡볶이 재료를 준비해 갔다. 남의 집 주방에서 요리하는 것도 어색하고 라면 외엔 아는 것이 없던 나는, 엄마가 알려준 대로 땀을 뻘뻘 흘리며 떡볶이를 끓였다. 흡사 연금술을 하는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그렇게 길쭉한 쌀떡을 잘라야 하지 않냐는 마흥이 말을 무시한 채 기다란 떡을 그대로 끓여서 떡국수볶이를 만들었다. 떡 국수는 불어서 곰솥을 가득 채웠다.
나에게는 처참하게 실패한 기억이었지만, 마흥이는 너무 재밌어했다. 자기 말을 안 들어서 길쭉한 떡으로 이상한 떡볶이를 만들었다고 그걸 학교에 싸와서 나눠먹으며 동네방네 모두에게 알려주었다. 그걸 먹으면서 맛있다고 나의 기를 살려주는 착한 반 아이들과 놀리면서도 그걸 싸와서 같이 나눠먹는 마흥이. 의외로 그 사건으로 나는 마흥이네 어머니께 점수를 땄는데, 내가 그 떡국수볶이를 끓이면서도 틈틈이 정리하고, 뒷정리까지 행주로 싹싹 닦아두는 모습을 보시고는 괜찮은 아이라고 고개를 끄덕이셨단다.
요리에 관한 또 한 가지 썰이 있는데, 대학에 들어가서 나는 처음으로 한인마트에서 알바를 했다. 거기에서 친해진 베트남 언니들이 해준 베트남 볶음라면이 너무 맛있었다. 마트에서 파는 작은땡초를 몰래 빼내와서 얇게 가위로 잘라 넣고, 편의점에서 파는 소시지를 잘라 넣어 먹는데 정말 맛있었다. 그게 무슨 마법의 레시피처럼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마흥이를 아주 특별한 미싸오(Mi Xao- 볶음라면)를 해준다고 집으로 초대했다. 그렇게 배운 대로 라면을 끓여내 왔고, 마흥이는 이게 다 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먹어보면 다르다고 부축였는데 그녀는 그저 맛있냐는 내 말에 덤덤하게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 이후에 마흥이네 집에 갔더니, 내가 마흥이에게 해줬던 '특별한' 미싸오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때 나의 특별한 미싸오가 아주 기본적인 국민 레시피였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마흥이는 아직도 나는 요리를 못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제법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게 두기로 했다. 그 덕에 가끔 마흥이가 해주는 파스타를 맛있게 받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흥이네 고향에 일주일정도 놀러 갔을 때다. Buon Ma Thuat (분마투엇)이라고 코끼리와 커피로 유명한 공기 좋은 곳이다. Trung nguyen이라는 베트남 커피브랜드의 본점이 크게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매일 아침마다 6시부터 우리를 깨우신 마흥이 아버지는 모두를 데리고, 그 커피숍으로 가서 아침을 드셨다.
딸의 한국친구를 신기하면서도 자랑스러워하셨던 마흥이 아버지는 어디에서든 한국인이라며 큰소리로 말하셨고, 나는 마치 연예인처럼 카페 식당 종업원, 주변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 했고, 마흥이의 고향에 있는 친인척들은 모두 내 이름을 알고 계실 정도였다.
마흥이는 언니가 2명 있는데, 첫째 언니는 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지?" 하고 물으면,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 있게 베트남어를 가르쳐주었고, 둘째 언니는 나와 마흥이 같은 친구가 자신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 언니와 나는 지금도 만나면 몇 시간이고 BTS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사실 마흥이보다 관심사와 성향이 비슷해서 말이 더 잘 통한다.)
보통 둘이 붙어 다니면 당돌한 건 주로 내 쪽이었는데, 그런 내가 무서워한 건 커다란 바퀴벌레였다. 어느 날 교실 사물함을 열었는데 안쪽에 떡 하니 바퀴가 붙어 있었다. 마흥이에게 소리치며 달려가서 매달리니, 마흥이가 매우 귀찮은 표정으로 바퀴를 말아쥔 공책으로 때려잡아 주었다. 그때만큼 든든하고 멋있었던 적이 없다.
막내딸이 걱정되셨던 마흥이네 어머니는 술은 아주 안 좋은 거라고 교육시키셨고, 대학생 시절 나에게 자신이 와인을 먹어봤다는 걸 고해성사하듯 말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랬던 그녀는 이제는 맥주 7캔을 마시고 제정신으로, 설날에 우리 집으로 문안인사를 올 정도로 말술이 되었다. 웬만한 아저씨들은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할 정도다.
어렸을 때 마흥이네 집에서 같이 자는데, 잠들기 전 마흥이가 물어왔다. 나는 원래 미친건지 아니면 친구들을 위해 미친적 분위기를 띄우는 것 인지. 나는 친구들하고 노는게 너무 즐거웠기에 자연스럽게 날뛴 건데, 왠지 후자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내가 그저 순도 높은 원숭이였을 뿐이었단 걸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마흥이는 내가 다른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면서, 문제없이 어울리기 위해 애쓰는 자신과 내가 닮았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렇게 닮았다고 생각하던 우리는 지금은 안다. 서로가 너무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몇 번 크게 싸우면서 서로를 더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무슨 오래된 부부마냥. 마흥이는 아직도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글을 쓰다 보니, 새삼스럽게 정말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왔다는 것에 감회가 새롭다. 학교에서 원숭이처럼 웃고 장난치던 그 마흥이는 어느새 내년 초에 결혼식을 올린다. 아직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미래 서로의 자식에게도 가족 같은 이모가 되어줄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