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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국어 하는사람? 나야 나.

근데 그게 이제 베트남어, 영어, 한국어인 경우...

by 반쯤 사이공니즈

한국에서는 더 많은 언어를 할 수 있을수록 더 멋있다고 생각해 주는 것 같다. 그게 곧 개인의 능력이자 스펙으로서 더 많은 돈을 벌게 된다는 통념으로 이어지는 것 같은데, 3개 국어 하는 나의 현실을 자문자답으로 풀어보겠다.

아 그전에, 베트남에서 영어와 베트남어를 일정 수준이상으로 구사하는 한국인은 드물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내 자랑을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베트남어는 6 성조를 가진 언어로 발음이 굉장히 어려워서 한국인들은 영어로 소통하거나 혹은 한국어 억양이 드러나는 그들만의 베트남어를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한인커뮤니티가 굉장히 커서, 식당, 학원, 교회, 미용실 등 굳이 베트남어를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 (혹은 배울 이유를 못 느낌)

영어를 잘하는 경우는 굉장히 많지만, 베트남어와 영어를 같이 구사하는 사람은 정말 많이 못 만나봤다. 아마도 영어를 하면 베트남어를 배울 필요가 없고, 베트남어를 하면 영어를 배울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되기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혼자 생각해 본다.

1. 각 언어는 어느 정도 수준인가?


제일 잘하는 건 한국어다. 자신 있다.

베트남어는 긴 대화를 하지 않는 이상 베트남사람인줄 아는 경우가 많다. 이름을 보고는 한국인인지 베트남사람인지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만약 나의 어눌함을 눈치챘다면 적어도 한국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베트남어는 발음만 잘 하면, 기세로 밀어 붙일 수 있다.)

영어는 베트남어보다 더 표현하고 소통하기 편하다고 느낀다. 자유도가 베트남어보다는 높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어로 업무적, 일상적 회화는 자연스럽게 가능하고, 적당한 수준의 테드강의나 영화는 자막 없이 본다. (실제로 영화관에서 베트남어자막이 달려서 반강제로 자막 없이 알아들어야 했다.)


2. 어떻게 영어와 베트남어를 배웠는가?


영어는 15살 때부터 베트남으로 건너와 필리핀 영어선생님 부부에게서 배웠다. 필리핀분들 특유의 강한 악센트도 없었고, 발음을 중심으로 교정해 주시고, 끈기 있게 가르쳐주셨다. 처음에는 과외로 시작, 다음에는 두 사람이 시작한 작은 대안학교(크리스천학교)로 들어가 미국교제와 함께 다른 아이들과 영어로만 대화하는 환경에서 지냈다.

베트남어는 베트남에 오자마자, 과외선생님과 기본기를 배운 후 바로 로컬학교에 청강생으로 입학했다. 청강생이란, 졸업자격이 주어지지 않지만, 수업을 들을 수 있고 시험은 보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 언어를 배우기 위해 던져진 야생이었다. 실제 나이보다 한 두 살 더 어린아이들과 같은 반에서 동고동락하며 장난치고 하나씩 언어를 배워나갔다. 선생님이 빼곡히 칠판에 적는 것들도 못 알아들어도 열심히 필기했다. 그러다 보니 발음보다 필기체를 더 빨리 익혔다.


3. 외국어를 잘 배우는 요령은 무엇인가?


무조건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못 알아들어도, 말하지 못해도 계속해서 그 언어를 듣고 쓰고 말해야만 하는 환경에 노출되어야 언어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향인의 언어를 배우는 방법은 묵언수행이다. 언어는 외향적인 성격이어야 빨리 배운다 하지만 내향인도 강하다. 관찰하고 경청하고 용기 있게 내뱉지 못한 말을 머릿속에서 여러 번 돼 내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완성된 문장이 튀어나온다.

배워야 한다, 공부하지 말고. 나는 14살 때 정말 알파벳부터 배워야 할 정도로 영어를 못했다. 처음 영어를 배울 때 한국처럼 동사, 형용사라던지 문법을 배우지 않았다. 사실 영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 어느 정도하고 나서야 벌브가 동사구나~ 아 이거야 하고 깨달았다. 딱히 그런.. 문법이나 용어는 중요하지 않다. 차라리 영어로 뭣도 모르고 배우면서 익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용법을 알게 되는 거 같다.


4. 외국생활 17년 동안 한국어를 모국어로 어찌 잘 지켜내었는가?


사실 외국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도, 가족과 같이 살고 있고, 한인커뮤니티가 큰 나라라면 모국어를 잃어버릴 정도의 일은 일어나기 쉽지 않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이 기둥처럼 자리 잡아가는 너무 어리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나이에 건너왔기에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5. 언어를 잘하면 돈을 잘 버는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언어가 돈이 되려면, 높은 수준의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번역 혹은 언어를 가르치려면, 그 언어를 단순히 말할 수 있다 이상의 수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의 전공이나 기술이 있는 상태에서 다양한 언어를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스펙이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 전공이 언어와 딱히 크게 별로 굳이 연관성이 없다면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만큼의 높은 수입으로 이어지기 쉽지 않다. 나의 경우, 멀티미디어 디자인을 전공, 브랜드디자이너로 일했다. 근데 나는 베트남어로도 영어로도 소통하면 일할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회사의 옵션이 늘어날 뿐이다. 베트남에서 외국계회사는 영어를 하는 건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베트남어를 잘하면 외국인상사와 베트남 직원들 사이의 귀찮은 중간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한국회사의 경우는, 대부분 통역직원이 있었다. 직접적인 언어능력이 필요한 경우는 드물었다. (내업무만 늘어날 뿐)

▶ 그리고 요즘은 AI의 번역 수준이 너무 좋아져서, 나의 개인적인 의견은 단순한 언어능력이 수입에 직결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고 조심히 생각해 본다. 하지만, 나를 더 독보적인 인재로 만들어주는데 큰 도움이 되는 능력치인건 맞다고 생각한다.


6. 3개 국어의 장점은?


필요할 때마다 언어를 골라서 사용할 수 있다. (외국인인척해야 할 때, 외국인인걸 티 내서는 안 될 때)

두려움이 적어진다. 물어볼 수 있고, 해결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어서 두려움이 준다.

볼 수 있는, 갈 수 있는 세상이 더 넓어진다. 언어에는 문화와 생각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자각할 정도로 식견이 넓어진다고 보긴 어렵지만, 예를 들어 구글링 할 때도 베트남어와 영어로도 가능하니 정보수집에 유리하다. 그리고 여행을 가도 영어로 소통가능한 곳이 많아서 좋다.


7. 3개 국어의 단점은?


뇌 용량이 많이 필요하다. 나는 많이 딸려서 지친다.

언어별 스위치가 가끔 혼선되어 작동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남들의 귀찮은 심부름이나 부탁을 떠안게 된다. 염치없이 부탁하는 통역은 돈도 안되고 귀찮기만 하다. (심지어 끝도 없다) 언어도 개인이 돈과 시간, 노력을 들여서 얻은 능력이라고 보는데, 그걸 공짜로 가져다 쓰는 거 같아 기분이 좋지 못하다.



살아오면서 많이 받아본 질문들을 정리해 자문자답처럼 적어 보았다.

돈이 되는 언어와 아닌 언어가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에게 언어는 생존의 기술 중 하나였다.

사람들과 이어지고 교류하기 위한 도구였고, 생존의 필수적인 능력이었다. 그래서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누군가는 나와 같은 조건에서 더 좋은 직장을 찾거나, 좋은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내 경제적인 성공을 이뤘을 수도 있다. 모두가 나와 같다는 일반화를 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게 전달되길 바란다.


봐주는 사람 없는 초짜의 글이지만, 혹시라도 더 궁금한 질문이 있다면 댓글 남겨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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