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그게 이제 베트남어, 영어, 한국어인 경우...
한국에서는 더 많은 언어를 할 수 있을수록 더 멋있다고 생각해 주는 것 같다. 그게 곧 개인의 능력이자 스펙으로서 더 많은 돈을 벌게 된다는 통념으로 이어지는 것 같은데, 3개 국어 하는 나의 현실을 자문자답으로 풀어보겠다.
아 그전에, 베트남에서 영어와 베트남어를 일정 수준이상으로 구사하는 한국인은 드물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내 자랑을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베트남어는 6 성조를 가진 언어로 발음이 굉장히 어려워서 한국인들은 영어로 소통하거나 혹은 한국어 억양이 드러나는 그들만의 베트남어를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한인커뮤니티가 굉장히 커서, 식당, 학원, 교회, 미용실 등 굳이 베트남어를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 (혹은 배울 이유를 못 느낌)
영어를 잘하는 경우는 굉장히 많지만, 베트남어와 영어를 같이 구사하는 사람은 정말 많이 못 만나봤다. 아마도 영어를 하면 베트남어를 배울 필요가 없고, 베트남어를 하면 영어를 배울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되기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혼자 생각해 본다.
▶ 제일 잘하는 건 한국어다. 자신 있다.
▶베트남어는 긴 대화를 하지 않는 이상 베트남사람인줄 아는 경우가 많다. 이름을 보고는 한국인인지 베트남사람인지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만약 나의 어눌함을 눈치챘다면 적어도 한국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베트남어는 발음만 잘 하면, 기세로 밀어 붙일 수 있다.)
▶ 영어는 베트남어보다 더 표현하고 소통하기 편하다고 느낀다. 자유도가 베트남어보다는 높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어로 업무적, 일상적 회화는 자연스럽게 가능하고, 적당한 수준의 테드강의나 영화는 자막 없이 본다. (실제로 영화관에서 베트남어자막이 달려서 반강제로 자막 없이 알아들어야 했다.)
▶ 영어는 15살 때부터 베트남으로 건너와 필리핀 영어선생님 부부에게서 배웠다. 필리핀분들 특유의 강한 악센트도 없었고, 발음을 중심으로 교정해 주시고, 끈기 있게 가르쳐주셨다. 처음에는 과외로 시작, 다음에는 두 사람이 시작한 작은 대안학교(크리스천학교)로 들어가 미국교제와 함께 다른 아이들과 영어로만 대화하는 환경에서 지냈다.
▶ 베트남어는 베트남에 오자마자, 과외선생님과 기본기를 배운 후 바로 로컬학교에 청강생으로 입학했다. 청강생이란, 졸업자격이 주어지지 않지만, 수업을 들을 수 있고 시험은 보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 언어를 배우기 위해 던져진 야생이었다. 실제 나이보다 한 두 살 더 어린아이들과 같은 반에서 동고동락하며 장난치고 하나씩 언어를 배워나갔다. 선생님이 빼곡히 칠판에 적는 것들도 못 알아들어도 열심히 필기했다. 그러다 보니 발음보다 필기체를 더 빨리 익혔다.
▶ 무조건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못 알아들어도, 말하지 못해도 계속해서 그 언어를 듣고 쓰고 말해야만 하는 환경에 노출되어야 언어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내향인의 언어를 배우는 방법은 묵언수행이다. 언어는 외향적인 성격이어야 빨리 배운다 하지만 내향인도 강하다. 관찰하고 경청하고 용기 있게 내뱉지 못한 말을 머릿속에서 여러 번 돼 내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완성된 문장이 튀어나온다.
▶ 배워야 한다, 공부하지 말고. 나는 14살 때 정말 알파벳부터 배워야 할 정도로 영어를 못했다. 처음 영어를 배울 때 한국처럼 동사, 형용사라던지 문법을 배우지 않았다. 사실 영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 어느 정도하고 나서야 벌브가 동사구나~ 아 이거야 하고 깨달았다. 딱히 그런.. 문법이나 용어는 중요하지 않다. 차라리 영어로 뭣도 모르고 배우면서 익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용법을 알게 되는 거 같다.
▶ 사실 외국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도, 가족과 같이 살고 있고, 한인커뮤니티가 큰 나라라면 모국어를 잃어버릴 정도의 일은 일어나기 쉽지 않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이 기둥처럼 자리 잡아가는 너무 어리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나이에 건너왔기에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언어가 돈이 되려면, 높은 수준의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번역 혹은 언어를 가르치려면, 그 언어를 단순히 말할 수 있다 이상의 수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다만, 나의 전공이나 기술이 있는 상태에서 다양한 언어를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스펙이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 전공이 언어와 딱히 크게 별로 굳이 연관성이 없다면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만큼의 높은 수입으로 이어지기 쉽지 않다. 나의 경우, 멀티미디어 디자인을 전공, 브랜드디자이너로 일했다. 근데 나는 베트남어로도 영어로도 소통하면 일할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회사의 옵션이 늘어날 뿐이다. 베트남에서 외국계회사는 영어를 하는 건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베트남어를 잘하면 외국인상사와 베트남 직원들 사이의 귀찮은 중간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한국회사의 경우는, 대부분 통역직원이 있었다. 직접적인 언어능력이 필요한 경우는 드물었다. (내업무만 늘어날 뿐)
▶ 그리고 요즘은 AI의 번역 수준이 너무 좋아져서, 나의 개인적인 의견은 단순한 언어능력이 수입에 직결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고 조심히 생각해 본다. 하지만, 나를 더 독보적인 인재로 만들어주는데 큰 도움이 되는 능력치인건 맞다고 생각한다.
▶ 필요할 때마다 언어를 골라서 사용할 수 있다. (외국인인척해야 할 때, 외국인인걸 티 내서는 안 될 때)
▶ 두려움이 적어진다. 물어볼 수 있고, 해결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어서 두려움이 준다.
▶ 볼 수 있는, 갈 수 있는 세상이 더 넓어진다. 언어에는 문화와 생각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자각할 정도로 식견이 넓어진다고 보긴 어렵지만, 예를 들어 구글링 할 때도 베트남어와 영어로도 가능하니 정보수집에 유리하다. 그리고 여행을 가도 영어로 소통가능한 곳이 많아서 좋다.
▶ 뇌 용량이 많이 필요하다. 나는 많이 딸려서 지친다.
▶ 언어별 스위치가 가끔 혼선되어 작동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 남들의 귀찮은 심부름이나 부탁을 떠안게 된다. 염치없이 부탁하는 통역은 돈도 안되고 귀찮기만 하다. (심지어 끝도 없다) 언어도 개인이 돈과 시간, 노력을 들여서 얻은 능력이라고 보는데, 그걸 공짜로 가져다 쓰는 거 같아 기분이 좋지 못하다.
살아오면서 많이 받아본 질문들을 정리해 자문자답처럼 적어 보았다.
돈이 되는 언어와 아닌 언어가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에게 언어는 생존의 기술 중 하나였다.
사람들과 이어지고 교류하기 위한 도구였고, 생존의 필수적인 능력이었다. 그래서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누군가는 나와 같은 조건에서 더 좋은 직장을 찾거나, 좋은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내 경제적인 성공을 이뤘을 수도 있다. 모두가 나와 같다는 일반화를 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게 전달되길 바란다.
봐주는 사람 없는 초짜의 글이지만, 혹시라도 더 궁금한 질문이 있다면 댓글 남겨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