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 8차선 사거리가 나온다. 마침 타이밍 딱 맞게 모든 신호등이 녹색불로 바뀐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걸어 대각선 방향으로 건넌다. 붕어빵 가게가 문을 열었다. 가을이 깊어간다는 증거다. 망설임 없이 천막 아래로 몸을 들이밀고 말한다. "붕어빵 바로 돼요?" 말하면서 훑어보니 갓 만든 토실한 붕어들이 줄지어 서있다. "슈크림 네 개, 팥 다섯 개요. 이체할게요." 1년 만에 사는 거지만 능숙하게 스마트폰 앱을 열어 붕어빵 값을 보낸다. 이체 내역을 보여드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봉지를 내미신다. 스무 살 무렵 강변역 버스정류장 앞 국화빵 팔던 분들이 떠오른다. 그땐 스마트폰도 없었지, 지폐와 동전을 세어서 주고받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붕어 아홉 마리를 받아 들고 천막을 빠져다오니 시원한 공기가 콧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 붕어빵을 사며 맡은 고소한 냄새가 떠오른다. 천막을 꽉 채운, 따스하고 고소하고 달달한 냄새. 나를 20년 전 국화빵 가게까지 데려다준 냄새. 기분 좋은 미소가 절로 나온다. 붕어빵 봉지를 흔들며 약속 장소로 걷는다.
어릴 때부터 냄새에 민감했다. 금방 비위가 상하고 예민하다는 뜻이 아니고, 냄새를 맡으면 그와 관련된 추억이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우리 뇌에는 후각으로 기억을 저장하는 공간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맞는 말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땐 사춘기가 일찍 그리고 세게 왔었나 보다. 내 방 창가에 있는 책상에 앉아있다 보면 방에 붙어있는 베란다의 우수관 쪽에서 한 번씩 어떤 냄새가 올라오는데, 하필 그 냄새만 맡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그 냄새는 고작 2박 3일 다녀온 수련회장의 그것과 비슷했다. 연이어 떠오르는 수련회 조교 오빠. 이름까지 아직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사춘기가 맞았던 것 같다. 나이도 사는 곳도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냥 좋았던 기억에, 다시는 볼 일이 없다는 것에 슬퍼하던 어린 내가 기억난다. 참 대책 없지만 귀엽고 순수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증상이 줄어들고 있다. 오로지 나만 챙기고 생각이나 감정을 관찰할 시간이 많던 시절이 끝나서 그런가 보다. 한 번에 하는 생각도 여러 개, 한 번에 맡는 냄새도 여러 개.. 너무 바쁘게 해내고 챙길 게 많아진 어른이 되고 나니, 떠오르는 건 몽땅 어린 시절의 추억이다. 이럴 땐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이라도 좀 더 여유 있게 살아가며 하나씩 하나씩 나만의 기억을 다시 쌓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한 이십 년쯤 또 지난 후에는, 어떤 냄새를 맡으며 지금의 내 나이를 회상하지 않을까. 그래, 그럴 것 같다.